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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Oct 23. 2021

조사관의 밥상

동료애

250명쯤 되는 조직에서 이십 년 가까이 일하다 보니, 가족 이상으로 친해지는 동료들이 생긴다. 정년퇴직을 앞둔, 마음은 언제나 청춘인 선배 K가 광주에서 홍어를 한 상자 주문해서 후배들을 불렀다. 몇몇 조사관들에게 메신저를 보내고 10명 정도 모이겠지 생각했는데 모여 보니 딱 10명이었다.


야근할 때마다 저녁을 먹는 식당의 주인장은 우리보다 홍어를 더 좋아해서 당신이 먼저 묵은 김치와 파김치를 꺼내 놓았다. 삼겹살을 구워 삼합 흉내를 내고, J 조사관은 집에서부터 가져온 묵은 김치와 채소, 양념들을 꺼내 즉석에서 홍어 무침을 만들어 냈다. 지글지글 삼겹살에 홍어를 얹고 묵은 김치로 크게 싸서 입 안 가득 밀어 넣으며 막걸리를 주고받았다.


세상에 모르는 것만 빼고 다 아는 B는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며, 그 특유의 썰을 풀기 시작했다. 홍어를 찌거나 구우면 냄새가 더 진해지는, 암모니아의 과학적 원리에 대해서, 나아가 조선 시대 최무선이 화약 제조를 위해 전국 변소를 찾아다니며 암모니아를 추출했다는 역사까지. 우리는 그가 사회학이 아니라 사실은 잡학으로 박사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늘 하는 농담을 하며 웃었다. 겨우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취했다고 웃는 J 는 소녀처럼 붉은 뺨을 하고서는 해남 고향에서 먹었던 홍어 전과 애탕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얘기를 조용히 들으며 삼겹살을 뒤집고 있던 막내 Y가 식당 부엌에서 조용히 달걀 2개를 얻어 나왔다. 즉석에서 달걀옷을 입혀 삼겹살 판에 홍어 전을 굽기 시작! 그리고 기왕에 먹는 김에 홍어 라면도 먹어보자며 김치찌개 4인분을 주문했다. 어느새 식탁 위에는 홍어회, 홍어 무침, 홍어 전, 홍어 라면까지 한 상이 차려졌다.


우리 일행 이후로 손님이 더 오지 않은 이유가 홍어 향 때문인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다행히 식당

주인장 부부는 손님이 더 오지 않는 것은 신경쓰지 않고, 나눠드린 홍어를 드시며 제대로 삭힌 홍어라고 좋은 평가를 해 주셨다. 고작 막걸리 몇 병에 우리는 하나같이 불그레해져서 별 대수롭지 않은 농담에 식당이 날아갈 듯 웃었다. 얼굴이 가장 붉어졌다는 이유로 H 과장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고 홍조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었다.


홍조회는 코로나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일주일이 멀다고 조사관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런 식의 조촐한 저녁 만찬을 하는 것이 야근하는 조사관들의 낙이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제대로 저녁 한번 먹지 못했다. 조사관의 밥상은 온갖 사건 이야기로 언제나 진수성찬을 이룬다. 조사관에게 동료의 존재는 밥이고 술이고, 삭힌 홍어 같은 찐한 무엇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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