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주의 전성시대
연고주의(緣故主義)는 혈연이나 학연, 지연 따위로 맺어진 관계를 중요시 여기거나 우선시 여기는 태도입니다(다음 한글사전).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연고중심의 공동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인맥이 형성되고 그러한 인맥이 신분상승과 부를 축적하는 도구가 되어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제목인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연고주의 전성시대'로 바꾸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한국사람들이 처음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의 서커스 수준으로 찾아내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름과 성을 묻고는 연이어 '어디 성씨'를 궁금해합니다(심지어 족보까지 알아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저런 걸 물어보나!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놀라운 것은 같은 가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서로는 경계를 허물고 형님, 아우가 됩니다.
어느 지역 출신 인지를 왜 또 그리 궁금해하는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에 대한 결정이 출신 고향으로 정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요직에 대한 인사 결정도 지역 안배가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훌륭해도 어느 지역 출신이면 안된다는 것이 말도 안 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한 연고를 중심으로 움직여온 우리 사회는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는 부작용을 만들었습니다.
최익현은 그 당시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연고중심형 인간입니다.
최익현은 세관원으로 일하던 중 금시계와 홍삼을 발견하고 범죄를 저지른 업자를 데려가던 중 건너 아는 사람 한마디에 한 순간에 돌변합니다. '관리과 박 과장님하고 내하고 집안사람입니다', 박 과장님이 집안 형님이라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뇌물을 받으며 넘어갑니다. '아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같은 세관 가족끼리'.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비리로 누군가 한 명이 옷을 벗어야 되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최익현이 총대를 매게 됩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전직 비리 세관원 최익현(최민식)은 밀수입된 마약을 처리하기 위해 부산 최대 보스 최형배(하정우)를 찾아갔다가 처음에는 신나게 두들겨 맞습니다. 그러나 최익현은 같은 집안이라는 혈연을 활용합니다. 최형배의 아버지가 최익현의 먼 친척이며 심지어 자신이 손윗사람이라는 점을 이용합니다. 어느 날 최형배는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라 해서 찾아 간 자리에 ‘집안 어른’으로 돌변해 있는 최익현을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신나게 두들겨 맞던 최익현은 최형배와 Family가 됩니다.
최익현은 '가문'이라는 네트워크를 엄청 활용합니다. 여동생이 남편 될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자,
'우리가 사는 게 이래 보이도 우리! 경주 최 씨 충렬공 파는 굉장히~ 유서 깊은 집안이다 이 말이다! 여기저기에 성공한 사람들도 많고~ 뭐 투 스타에 포 스타에 대한민국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전부다 우리 집안사람들이다 이 말이다!'라고 말하며 유명인과 같은 집안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합니다.
최익현은 유명인과의 친분을 이용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입니다. 경찰서에 잡혀가도 잡아간 형사의 얼굴을 내리치며 '니 내가 누군지 아나? 리그 서장 남천동 살자! 내가 인마 너희 서장이랑... 어저께도! 밥 묵고! 사우나도 같이 하고! 다 했어!' 경찰은 순순히 그 말을 믿고 본인들의 잘못(?)을 사과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뿐인 여동생 남편에게 자랑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경찰에게 위협을 가하는 수준까지 그리고 범죄를 덮는 데 까지 갑니다. 경주 최 씨 충렬공파 족보 하나로 부장검사와 집안사람이 됩니다. 알지도 못하는 집안 어른에게 돈을 쥐어주며 부장검사와 인연을 맺습니다. '너희 아버지 우리 형님의 할버지의 9촌 동생의 손자가 바로 익현 씨 인기라!" 이렇게 부장검사의 '대부님'이 됩니다. 부장검사의 전화 한 통화로 최익현의 모든 범죄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돼 곧 잡혀가게 될 최익현은 영화에서 최익현의 인맥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수첩 하나를 흔들며 '니 이게 몬 줄 아나. 이게 바로 10억짜리 전화부야. 10억짜리, 글 마들 내 절대 못 잡아넣어!' 자신의 힘을 호언장담하며 과신합니다.
본인에게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를 해결하고자 인맥을 활용해 자신을 수사 중인 조검사와 술자리도 만듭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최익현은 또 한 번 머리를 굴려 본인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최형배를 잡도록 돕겠다고 합니다. 본인이 살기 위해 최형배를 배신하여 경찰에 넘긴 최익현은 이번에도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한 현재 시점에서 연고중심형 인간 최익현과 그 가족 심지어 그때 그 검사까지 모두 성공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처음을 여는 의인이었던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는 이야기와 대비하여 소행이 악행을 저지르고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이 복을 누리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연고주의 사회가 되었나? 생각해보면 '믿을 것은 내 가족뿐'이라는 믿음을 만들어낸 독특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국가와 권력에 대한 불신과 한국전쟁을 통해 믿을 것은 내 가족뿐이라는 신념을 뿌리 깊게 심어주었습니다. 나와 가족을 떠난 주변에 대해 불신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갑자기 만들어진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이념이 정해지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이웃이 가족을 고발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극한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은 가족 간의 믿음과 신뢰가 극단적으로 높아지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국가에 대한 신뢰는 극단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시기의 국가의 모습은 징병, 물자 수거, 동원, 학살 등의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피붙이 이외에는 믿을 게 없다’라는 강한 신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국가를 신뢰하고 시민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어야 할 것입니다. 연고에 의해 그 안에서만 혜택을 누리는 사회가 아닌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인 신뢰, 즉 사회적 자본이 형성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국가와 사회든 그 국민의 수준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 유명한 격언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 '를 생각하며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생각하지만 씁쓸함은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의 하나 된 모습과 촛불정신을 보면서 우리도 사람 살만 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도 공정하고 신뢰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 사진출처 :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