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르페디엠 Sep 21. 2020

올리버 트위스트

맬서스의 인구론 시대에 빈민을 보는 시각

 빈민을 보는 시각 : 잉여 인간, 개인의 책임-도덕적 태만의 결과


  맬서스(Malthus)는 인구론이라는 책을 통해 인구증가와 음식물 간의 불균형을 이야기하면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음식물은 산술적으로 증가하여 결국 기아가 속출하는 불균형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재앙적 경고를 하였습니다. 언뜻 들으면 정말 끔찍한 일이 날 것 같다고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맬서스의 예상은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시대는 많은 국가에서 음식이 넘쳐나고 있으며 남아도는 음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기까지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덜 먹을 수 있을까?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시대가 아닌 어떻게 하면 안 먹을 것인가? 를 고민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맬서스의 인구론(1798년 초판 발행)은 그 당시 시대 상황과 맞물려 식량부족과 인구 폭탄이라는 위기감을 만들어내었습니다. 1829년부터 1832년 사이는 심각한 상업의 침체와 계속된 흉작으로 영국 전체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북부에서는 폭력적인 산업 소요가 계속 발생하고 남부에서는 폭동이 자주 일어나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맬서스는 증가하는 인구를 문제의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인구를 줄여야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구 감소의 대상은 부자들이 아닌 가난한 빈민들만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잉여인간으로 보고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가난하게 된 원인을 어떠한 사회경제적인 상황과 연관 없이 그 사람의 도덕적 태만과 같은 개인의 잘못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빈민을 잉여인간으로 보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마치 진리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기존의 빈민법을 개정하는 신빈 민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신빈민법에서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을 유자격 빈민(the deserving poor)과 무자격 빈민(the underserving poor)의 구분하였습니다. 유자격 빈민은 노인, 장애인, 병자, 실직자처럼 자신의 과오와는 무관하게 빈민이 된 사람으로 이들은 구빈원(Workhouse)에서 시설 구호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게으름, 알코올 문제 등 자신의 과오로 말미암아 빈민이 된 사람에게는 구호를 받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원조를 받을 자격이 없는 빈민은 영국의 바깥의 영토나 식민지로 방출하였습니다.   


   구빈원(Workhouse)에서는 빈민에게 일을 시켜 노동을 통해 스스로 먹을 것을 벌어먹게 하자는 처음 취지와는 달리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젊은 사람들은 점차 사라지고 고아와 노인, 병자와 같이 갈 곳이 없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결국 구빈원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찰스 디킨즈는 올리버 트위스트(1837년) 소설을 통해 신구빈법이 시행된 빈민에게 참혹한 시기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1834년 신구빈법 제정, 1836년 시행).  올리버는 트위스트는 사생아였습니다. 당시 사생아를 낳은 여성은 극심한 궁핍과 수치심에 내몰려야 했습니다. 신빈 민법에서는 사생아 조항을 만들어 사생아를 낳은 경우 남자에게는 어떠한 재정적 책임도 부과하지 않고 모든 짐을 아이의 엄마에게 올려놓았습니다.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돌리는 참혹한 시대였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엄마 아그네스도 사생아를 낳은 여성이었습니다. 도시의 부랑자 시설에서 아기를 낳은 아그네스는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죽기 전에 아기를 보여주세요". 의사가 아기를 안겨주자, 여인은 핏기 없는 차가운 입술로 아기의 이마에 뽀뽀를 했다. 여인은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고 축 늘어졌다.] 이렇게  고아가 된 올리버는 만(Mann) 부인의 고아원(Baby farm)에서 9세까지 지내다 신구빈법에 의해 구빈원에 보내집니다. 참혹한 구빈원 생활과 런던 뒷골목에서의 올리버 트위스의 삶은 그 당시 올리버와 같은 고아가 겪어내야 하는 삶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올리버와 같은 빈민을 보는 시각은 '잉여인간'을 뛰어넘어 '미래의 범죄자'로 까지 낙인을 찍습니다. 구빈원에서 올리버를 처음 본 감독관은(미래에)‘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이러한 시각은 당시 빈민에 대한 대중의 시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Workhouse 모습

  당시 공장주들은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구빈원을 활용했습니다. 구빈원이라는 이름의 감옥을 만들어 강제 노동을 아동들에게 시켰습니다.  신구빈법에 의한 구빈원(Workhouse)은 감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빈민들은 죄수와 같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7세만 넘어도 남녀를 구분해서 수용했으며 돌을 부수는 등의 힘겨운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명분상은 나태한 사람들이 제 발로 찾지 않도록 혹독하게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God is holy, God is truth


Please Sir I Want Some More

  올리버가 구빈원에서 먹을 것을 좀 더 달라고 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입니다. 구빈원에 있는 아이들은 너무 배가 고파 관리인에게 ‘먹을 것을 조금 더 달라’는 말을 할 사람을 제비 뽑습니다. 

   올리버가 제비뽑기에 걸려 밥을 더 달라는 말을 합니다 ‘선생님 제발, 조금만 더 주세요’ 이 말을 들은 관리인은 눈이 똥그래지고 너무 놀라며 올리버를 막대기로 때리려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올리버의 행동보다 올리버의 행동에 놀란 직원과 감독위원들의 반응입니다.


  ‘림킨스 씨 죄송합니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음식을 더 달라고 합니다’ 모두가 깜짝 놀라 합니다. 공포가 모든 이의 표정에 서려있습니다. 비참함을 호소하는 올리버에 대해 감독자들은 놀라움, 두려움, 공포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러한 감독자들의 반응은 지금의 시각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시 빈민을 보는 시각은 빈곤은 전적으로 개인의 잘못으로 보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악한 착취의 시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올리버를 그들에게 저항하는 인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올리버의 저항 행위는 반드시 제지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올리버의 생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만 하고 다른 빈민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격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정해진 양의 죽보다 더 달라고 요구하는 말썽 많은 아이는 추방하는 것이 낫다는 위원회의 결정이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올리버는 구빈원에서 도제라는 허울 좋은 명칭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구빈원은 올리버를 데려가는 사람에게 5파운드를 주겠다는 '방'을 붙입니다. 빨리 아무에게나 보내버리고 싶은 상황에 잔인한 굴뚝 청소부가 돈이 목적인지, 아니면 일을 부려먹을 하인이 목적인지 모르겠지만 올리버를 데려가고 싶어 합니다. 험상 굿은 굴뚝 청소부를 본 올리버는 교구 판사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모습을 본 교구 판사는 올리버를 굴뚝 청소부에게 보내는 것을 거부하고 아이에게 잘해줄 것을 지시합니다. 5파운드에 아이를 처리하는 구빈원의 감독자들은 모습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없는 가혹한 시대 모습을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도 인간을 도구로 보며 만약 가치가 없어지거나 저항하면 가차 없이 처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그려지는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화 속 관리자들처럼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본인의 잘못을 모르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무비판적으로 해오던 잘못된 관행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프리 모레 비의 시처럼.. 생각하지 않은 죄를 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조직과 이 사회가 인간을 그 존재만으로 귀하게 여길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빈곤 해결의 책임 : 개인의 자선이 아닌 국가 역할로(나눔보다는 분배로)

   

귀족인 자선가 브라운 로우(출처 다음 영화)

  영화에서는 극적인 재미와 감동을 위해 올리버의 미래를 구하고 책임지는 귀족'브라운 로우'씨가 등장합니다. 당시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빈곤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고 결국 그러한 사람을 돕는 주체도 개인 자선가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빈곤문제 해결은 국가가 아닌 개인 자선가나 종교기관에서 해야 하는 할 일이었습니다. 영화에서도 올리버 트위스트의 삶도 착한 귀족인 브라운 로우씨가 구원해줍니다. 


  18~19세기까지도 빈곤문제는 개인과 자선단체에서 자격이 있는 사람만 도와야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자선조직협회(COS, Charity organization society, 1896년)나 인보관 운동(Settlement house movement, 1884년)도 온정주의에 의한 복지 형태였습니다. 신빈 민법의 시행과 자선조직협회 및 인보관 운동과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빈민의 삶은 여전히 개선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빈곤의 문제는 개인적인 노력과 더불어 사회구조적인 문제로도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자선이 아닌 국민으로서의 권리에 입각한 사회복지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더니 웹, 비어트리스 웹’ 부부의 페이비언 협회의 활동과 이들의 노력으로 ‘내셔널 미니멈(Naional Minimun)-국민 생활 최저선(사회적으로 공인하는, 국민의 최저한도의 생활수준)’이라는 유명한 복지 명제를 처음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소수파 보고서(Minority Report)도 이들에 의해 탄생했는데 신빈 민법에 대한 불만과 높은 실업률, 사회불안이 심화되자 당시 내각은 20명의 왕립빈민법위원회(1905년)를 구성하여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16명의 다수가 결정한 보고서는 빈민에 대한 기존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어트리스가 포함된 4명의 소수파 보고서(1909년)에는 기존 빈민법의 완전 폐지와 빈곤 시스템의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습니다. 이 보고서에는 영국의 국가 보건서비스 제도와 유사한 보편적 건강서비스 계획을 최초로 제안하였습니다. 이 보고서가 모태가 되어 베버리지 보고서(1942년)가 나오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 수상이 사회개혁가인 베버리 지경에게 '베버리지 위원회'를 구성하여 전쟁 이후 영국 사회를 견인할 청사진을 제시하도록 만든 보고서입니다. 궁핍(want), 질병(disease), 무지(ignorance), 불결(squalor), 나태(idleness)를 '다섯 가지 악'으로 규정하고 국가가 사회보험 제도를 정비하여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베버리지 보고서(1942년)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영국 사회보장 시스템의 밑그림을 만들었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보면서 18~19세기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개인의 불행과 개인의 무능함으로 보는 시선이 강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된 맬서스의 인구론과 같은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모두 과거의 산물입니다. 미래를 알고 올바르게 나아가고 싶다면 과거를 복기하듯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여전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빈민에 대한 생각은 개인의 잘못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그 생각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올리버 트위스트 영화 속 만찬을 즐기는 관리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은 빈민이 아닌 사회적 약자로 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물론 개인은 본인의 잘못으로 가난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조적인 잘못으로 가난이 대물림되거나 빈곤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우리 모두는 불안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도 예를 들어 직장을 잃어버릴 경우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상황이라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러한 불안감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솔직히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나는 자연인이다'가  될 용기도 없지 않습니까! 불안한 삶의 현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된 사회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입니다. 복지에 의존하여 자존심마저 빼앗긴 비참한 하루하루의 삶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더 애써 볼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를 희망합니다. 이는 빈곤에 대한 접근에 있어 개인의 나눔에 의존하기보다는 제도에 의한 분배에 의해 운영될 때 가능할 것입니다.   


* 사진출처 : 다음 영화

이전 08화 비밀과 거짓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