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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dos Paul Jan 29. 2024

정체성이라는 착각

일관된 자아를 향한 거부

누구나 한 번쯤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답해본 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해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는 대답도 도출해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 즉 나를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스스로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는 순간 나라는 사람의 모습이 구성되고 규정되며 나의 자아는 결정된다. 아니, 결정된 것처럼 보인다. 


    최근 지인과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지인은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 거리낌 없이 드러나는 자신의 '진짜' 모습과 교회와 같은 사회적 공간, 즉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이들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가짜'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신의 '가짜' 모습만을 보던 이들이 '진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두렵고, 자신의 '가짜' 모습이 마치 가면을 쓰는 것 같이 가식을 떠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정체성 등과 자신의 사회적 모습과의 괴리, 그리고 그것이 들킬까 봐 불안에 떠는 두려움은 몇몇 현대인들이 자주 갖는 고민 중 하나인 듯하다. 이러한 고민의 원천은 나의 내면에는 통일적이고 일관적인 불변하는 하나의 '자아'가 있고 그것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관된 자아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대게 심리적으로 가까운 이들, 가족 혹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보인다. 이것이 자신의 참모습이라고,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수많은 불편하고 거리감 있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은 가짜이고, 가식이며, 가면이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로 이 빌어먹을 '일관된 자아'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일까? 이 자아는 도대체 언제 형성된 것일까? 내가 그렇게 나 자신을 규정하기로 마음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나는 이 모습을 나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정말로 내 정체성은 한 가지 일관된 것으로 정해져 있는 것일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필자는 그러한 일관된 자아라는 개념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아울러 '정체성'이라는 단어 또한 이것이 주는 어감 때문에 반대한다. 


    '정체성'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이렇듯 '나'라는 주체에 '정체성'을 연결하여 사용할 때에는 이미 무언가 불변하고 고정된, 일관적인 성질로써의 '나'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정말로 나를 규정하는 텍스트는 하나로 유일하며 불변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자아가 형성되고 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하나의 이미지와 텍스트 만으로 규정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필자는 이러한 인식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필자는 '나'라는 주체를 규정하고 구성하는 것은 지난날들의 나, 즉 과거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내 지난날들의 경험들과 순간의 선택, 그로 인한 결과와 감정들이 누적되어서 현재 거류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적용되어서 이 순간의 현존하는 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나라는 사람의 모습은 일관될 수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거는 계속해서 누적되며, 현재의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나의 모습 따위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 없다. 무한히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자신의 모습들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차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어떤 모습이 더 우세하여 상위에 있고, 어떤 모습은 열등하여 하위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계층적 분류는 지극히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다. 지금 드러나는 나의 모습은 그저 지난날들의 누적된 결과가 현재라는 거푸집에 부어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보이는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나 그 자체이다. 그것들은 모두 각자의 '일리'가 있다. 나라는 주체들은 모두 각자 안에 수많은 '나'를 포함하고 있다. 이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일관된 자아'를 고집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억압과 왜곡을 낳는다.


    김정운은 <에디톨로지>에서 근대사에서 보여준 서양 문명의 강력한 영향력은 '원근법'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서양은 철저한 원근법의 적용을 통해 3차원의 입체적인 인상을 2차원의 평면적인 이미지로 구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원근법이 발견되고 난 후로, 서양 미술은 현실의 이미지를 철저히 동일하게, '객관적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8B%A4%EC%A0%9
https://www.pinterest.co.kr/pin/draughtsman-drawing-a-recumbent-woman-draughts--308989224405555896


    이때 반드시 모든 선들이 소실점으로 수렴하게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이러한 소실점은 반드시 이미지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화가의 고정된 시점을 기준으로 잡게 된다. 달리 말하면 소실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즉 화가가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점이 어디에 존재하느냐는 지극히 화가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서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데 사용되었던 원근법은 필연적으로 그리는 이의 주관성을 전제하고 있다. 즉 객관성은 주관성을 함의한다. 주관성이 있어야 객관성을 구현할 수 있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주관적인 시선을 '제3의 시선'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대부분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진짜' 객관적인 모습이라고 선언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화가가 자신의 입맛에 따라 편집하고 재구성해낸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려 했던 이들조차 각자 순간의 기준에 따라서 세상의 일부 면모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굉장히 사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림들은 단지 세상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구나를 알려주는 하나의 자료일 뿐이다. 


    세상마저 이렇듯 바라보는 이에 따라 이토록 가변적인 모습과 바라볼 수 있는 다채로운 관점들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사회 속에서 수많은 타인들과 교류하며 영향받고, 영향 주는 '나'라는 존재는 어떠하겠는가? 그 수많은 그림들 중 무엇이 세상의 '진짜' 모습일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그림이 존재하는가? 아니다, 결단코 그럴 수 없다. 그러한 절대성은 이미 아인슈타인이 진작에 폐기해 버린 개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물리적 객체들의 집합인 세상도 그러하고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인 '나' 또한 그러하다. 


    사실 '개인'이라는 개념조차 문화적, 사회적 편집의 결과이다. 발달심리학에서는 흔히 각 개인을 분류하는 요소인 아동, 청소년, 청년, 어른, 노인의 개념조차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필요와 요인들에 의해 구성되고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 <에디톨로지>에서 김정운이 말하는 바이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개인을 분류하고 규정하는 요소들 조차 필요에 따라서 끊임없이 편집되어 왔다는 것이다. '나는 청소년이다, 노인이다'라는 선언은 그저 편집된 개념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여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수많은 모습들 또한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의 상황에 의해 시시각각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편집된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자신을 결정하고 규정짓는 주체는 바로 '나'라는 것이다. 지난날의 자신의 선택이 과오처럼 보이고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지라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모습들이 누적되어 현재의 내가 만들어졌다. 그러기에 그 모든 모습들이 바로 나 자신이었노라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진정한 본모습'들'이 무엇인지 똑바로 직시한 채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한 발짝씩 내딛으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편집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백인에게는 친절하고, 동남아인에게는 무례한 것일까? 어째서 백인은 좀 더 우월해 보이고, 동남아인은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져 보이는 인식이 있는 걸까? 김정운은 <에디톨로지>에서 이는 단선론적 발달관을 가지고 있는 근대 해석학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단선론적 발달관이란 역사는 단 하나뿐인 시간의 축에서 일어나며, 모든 변화는 이 하나의 축에서 한 가지 방향으로만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역사관에서 모든 사회는 각자 나름의 '수준'이 있고, 여기서 각 나라의 우월함과 열등함이 갈린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나라는 열등한 나라를 '계몽'시킬 필요가 있으며, 여기서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정당성, 합리성이 확보된다. 그 '우월'하다는 나라들이라는 앞서간 존재들이 있으므로 '열등'한 나라들은 그저 그 모델들을 보고 발달을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범사회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공통적인 발달관이 존재하기에, 각 나라의 다양한 문화는 전부 무시되며 오직 얼마나 문명화되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이러한 발달관이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은연중에 영향을 미쳤기에,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며 유럽과 미국은 상대적으로 우월하며, 동남아나 아프리카는 뒤떨어졌다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단코 각 나라의 문화조차 이러한 단선적인 틀 안에 가두어 가치를 논할 수 없다. 이는 각 나라의 기술적, 경제적 발전 수준을 문화적 수준과 동일시해서 바라보는 지극히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뉴욕의 타임 스퀘어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이 존재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다윈의 진화론이 무언가 더 좋은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주어진 환경 속에서 더 잘 적응하는 방식으로 '변화'해 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다윈의 진화에는 방향이 없다. 그저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억겁의 시간 속에서 변화하며 나아갈 뿐이다. 


    나라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자신의 모습들을 단선적인 틀 안에 가두어 평가할 수 없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따라 드러난 내 수많은 모습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게 다다. 그저 타임스퀘어 만의 문화가 있고 앙코르와트 만의 문화가 있을 뿐인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주제넘게 가르친다든지, '계몽'한다든지의 태도 따위는 낡아 빠졌다.


    누구나 타인에 의해 자기 자신이 규정되기를 원치 않는다. 감옥이 달리 감옥이 아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한다.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갈 때가 그 어느 때보다 주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갈 때 비로소 나는 '나'로서 살아갈 수 있다. 


    필자는 <닫힌 방>이라는 희극의 수필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 바 있다.

자신을 규정하려는 타인의 시선들, 그리고 그것에 은근히 편승해 자신의 의식을 내던져버리고 굳어버려 육중한 돌덩이가 되려 하는 무의식에 저항해 순간의 자신의 삶을 선택해 개척해 나가고 스스로를 규정해 나가는,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자신에 대한 회의와 고뇌, 자기 번민을 통해 완성되는, 그러한 선택들이 누적되야만 그제야 비로소 '나'라는 실존이 본질을 완성하는 것이다.

https://brunch.co.kr/@samico/1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삶은 불안하고,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직시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선택해 나감으로 나라는 실존의 본질을 완성해 가는 삶이야말로 살 가치가 있는 삶이다. 


    때문에 필자는 이 글을 빌려 지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가짜' 모습과 '진짜' 모습 따위는 정해져 있지 않고, 당신의 모든 모습들이 '진짜' 당신의 모습이라고. 누군가는 그 모습들을 보고 욕하고, 판단하고, 떠나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삶은 살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라고. 당신에게 그러한 '일관된 자아'를 요구하는 모든 억압을 거부하라고. 마지막으로, 당신 스스로를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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