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학문」
기본적으로 전제 없는 학문이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전제란 각 학문에서 중요시하는 가치들에 대한 전제이다. 즉 어떤 학문에서 규명하고 밝혀내려고 하는 지식들과 사실들이 어떤 의미에서 알 가치가 있는 것들이기에 그렇게 노력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한 대답들이 요구되고 나서야 비로소 학문을 논할 수 있는데, 이 대답들은 학문의 영역 밖에 있다.
오늘날 각 학문은 너무나 전문화되었기 때문에 영역을 넘나드는 연구는 결코 위대하게 취급받을 수 없으며, 그저 해당 영역에서는 제기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위대한 학문적 성취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모든 혼을 쏟아서 몰두할 때 이뤄진다. 이러한 성취의 전제 조건은 온 힘을 쏟는 열정과 사소한 계산 하나까지도 허투루 흘리지 않는 치밀한 작업이며, 이 둘이 합쳐질 때 비로소 착상이 이뤄진다. 그러나 착상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고 해서 항상 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다른 사소한 일을 할 때 나타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제 좋을 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서 골똘히 고민하는 시간이 있어야 착상이, 즉 영감이 생겨난다. 노력은 착상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직업으로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외적인 요소들, 다시 말해 요행에 압도적 영향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직업으로서 학문은 반드시 객관적 성과대로 자리를 찾아가지 않는다. 즉 착상과 동일하게, 노력한다고 반드시 성취가 오지는 않는다.
또한 학문은 그 본질 상 무한한 진보 속에 놓여 있다. 즉 기존의 연구는 낡아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연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직업으로서 학문에 종사한다는 결심은 그 진보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저 바통을 넘겨주는 역할에 불과하다는 운명을, 필연적으로 썩어 없어지고 낡아빠진 연구자로서 지나간다는 운명을 의미한다.
이러한 실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결말에 대해 수많은 내적 상처를 입고 사소하기 그지없는 존재로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으로서 학문에 종사할 것인가? 다시 말해 도대체 학문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러한 질문의 대답은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주어져 있고, 나만이 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수많은 신들, 수많은 가치들이 해소될 수 없는 투쟁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다신교 사회에서 직업으로서 학문에 종사한다는 결심은 학문에 종사하는 이유, 즉 내 인생의 전제를 주체적으로 정한다는 결심과 동일하며 나에게 있어서 학문의 의미에 대답하겠다는 결심이다. 따라서 나는 무엇을 신으로 삼을지에 대한 결정을 반드시 내려야만 한다. 과연 내 인생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학문 그 자체는 위와 같은 대답과 결정을 종사자들에게 주지 않는다. 이러한 가치판단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결심이다. 학문은 오로지 사실확인만을 위해서, 가치판단을 내리기 위한 사고 과정의 방법과 논리를 제시하고 도움을 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내가 삶에서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지, 그러한 대답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으며 학문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순수한 학문의 장인 강단에서 교수는 어떤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암시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수강생들이 자신의 신을 결정하는 데 온 힘을 쏟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강단에서는 오로지 사실확인만을 중시해야 한다. 가치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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