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말이 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뜻이다.
자칫하면 궤변처럼 보일 수 있지만, 너무나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많은 이들에 의해 즐겨 인용된다.
즉 모순적이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야말로 모순 투성이인 종교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3-24)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9)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그럴 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사도 바울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약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약함을 자랑하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모순인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 함은 짐승들도 안다.
또한 힘이 약하면 무엇 하나 지킬 수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위 말씀들을 진리로 여기고 기꺼이 실천함을 의미한다.
예수님 자신부터가 모순적인 존재이셨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구원하려 오신, 누구보다 높은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시골 촌구석, 그중에서도 천한 짐승이 거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그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앉지 않으시고,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스스로 달려 돌아가셨다.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더욱 고귀하고 값지다.
이런 찬양의 가사도 있지 않은가?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죽어야 살게 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영원한 신비
「그가 오신 이유」中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나를, 오늘 하나님께서는 자녀라 불러주시고 친구로 초청하신다.
뿐만 아니라, 이토록 연약하고 볼품없는 나를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예수님 따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 되길 원한다.
더욱 낮은 곳으로, 더욱 천한 곳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