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말들> -일상을 다시 발명하는 법
유명한 관광지라더니 사람이 과하게 많다 싶었다. 코로나로 다들 여행을 못 간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지 궁시렁궁시렁대며 이름 모를 누군가의 퉁퉁한 엉덩이를 뒤따라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내 엉덩이 뒤엔 또 다른 이가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고, 그 뒤엔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뒤엔 또 또 다른 누군가가 뒤따르고 있었다. 일개미의 행렬이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는 없을 것 같았고, 내 몸은 짐을 잔뜩 메고 있는 것처럼 무거워졌다. 이게 여행인지 아니면 수용소의 노동 행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자꾸 걸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쇳덩이 같은 내 몸 위로 또 다른 쇳덩이가 얹혀 질식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몸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고 땀도 삐질삐질 나고 있었다. 이제 이 여행을 그만 하고 싶다고 소리 지르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누구 하나 말을 하지 않은 채 표정 없이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 순간 "으이에옹~" 하는 구름이 소리가 들린다. 아니 언제 구름이가 날 따라오고 있었던 건가. 비몽사몽 몸을 흔들어보니 구름이가 은은한 눈빛으로 나를 부르고 있다. 내 몰골은 땀으로 축축하고 몸은... 온 관절 관절에 쇳덩이를 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침대에 눌어붙은 몸을 떼어내어 지난밤 테이블에 올려놓은 타이레놀을 집어삼켰다.
'아...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려다 이렇게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는 게 아닌가! 꽃다운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꽃중년인데...'
어제 호기롭게 잔여백신으로 맞은 2차 화이자 백신이 이렇게 무섭게 내 몸을 강타할지 예상하지 못했다. 1차 백신 접종이 순조로웠기에 자만하고 있었나 보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 무거운 쇠뭉치로 침대에 딱 들러붙은 채 꼬박 연휴 이틀을 보냈다. 책을 들 힘도 없던 그때 내 손에 붙잡힌 건 유유 출판사의 가벼운 **의 말들 시리즈 중 하나인 이다혜 기자의 <여행의 말들>이었다. 갱지 종이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유유 출판사의 작은 책을 사랑한다. 게다가 작가가 심도 있게 고른 100권의 책에서 여행에 대한 단상이 메모되어 있는 책이라니. 마치 어두운 불행 앞의 작은 빛줄기를 잡는 심정으로 한 단락씩 읽고 상념에 잠겼다. 몸은 침대에 마음은 어느새 못 갈 곳 없이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다.
우리는 각자 개별적인 여행의 이유를 갖는다. 나를 찾기 위해서,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 삶의 자극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등등... 이다혜 작가는 '살아 있구나'를 느끼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한다. 일상을 잘 살아내기 위해 참고 삭힌 내 감정들에 의해 점점 생의 의지를 잃어갈 때 여행을 마음먹게 된다고 한다. 잘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밀려올 때, 나 자신에게 매우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을 때 여행만큼 좋은 게 있을까.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이와 함께 (책도 포함) 끝도 없이 여행을 상상하는 것은 역시 즐거운 일이다. 그렇게 <여행의 말들>은 코로나 백신 후유증을 살살 달래주었다.
일상을 벗어나고자 떠난 여행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은 다시 일상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상 속에 있던 주인공의 '나'란 존재가 3인칭으로 바라봐질 때 꼬여있던 일상의 문제가 새롭게 보일지도 모를 일이며 그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의 '사치'에 대한 단상이 재미있다. 작가는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사치라고 생각해왔지만 사회생활 연차가 쌓이자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는 것이 사치구나 싶다고 말한다. 진실이라고 하기엔 웃프다. 매일일 수는 없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하기 싫은 일에서 잠시나마 자유를 누리는 삶. 그게 쉼이고 여행이다.
여행의 묘미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추구할 때 가장 값진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에 쓸모를 따지고 호율의 극대화를 요구받는 삶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의 기쁨을 여행을 좀 해 본 이라면 알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듯이 쓸모없는 일에 진심을 다하는 삶. 죽기 전에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으로 기억될 그것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이틀을 꼬박 앓고 죽은 듯 깊은 잠을 잔 후 한층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일어났다. 역시 새로운 오늘의 태양이 떠 있다. 일상은 어제와 같이 흘러가지만 마음은 이미 책과 함께 지구 구석구석을 누빈 직후이다. 코로나도 무섭지 않은 꽃중년은 긴 여행을 다녀온 마음으로 다시 일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용기의 쿠폰을 흐뭇한 미소로 만지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