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늙는 건 그렇다 생각하는데 내 딸이 이렇게 나이가 든 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아빠의 말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내 나이가 아빠를 짠하게 만들 나이가 되었구나. 그런 나는 아직도 아빠에게 아이처럼 아빠, 아빠 하고 말을 건넨다. 이런 철없는 딸이 벌써 흰머리도 하나씩 돋아나고 주름도 늘어나니 아빠는 믿기지가 않는다고 하셨다.
아름다운 3월의 끄트머리에, 엄마, 아빠, 서울에 있는 언니, 그리고 내가 합체가 되어 꽃놀이를 갔다. 어쩌다 보니 가장 핫한 시기에 경주 벚꽃 구경을 하게 된 거다. 이 시기가 절정이란 걸 생각했으면 너무 사람이 많을 거라는 두려움으로 피했을지도 몰랐다. 그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맞추니 그렇게 벚꽃도 함께 등장한 것이다. 엄마, 아빠가 어릴 적 우리를 데리고 꽃 나들이를 가듯이 우리는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꽃길을 걸었다. 엄마, 아빠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 예쁜 꽃 세상을 이제 우리가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나는 연신 엄마, 아빠에게 묻는다.
"엄마, 꽃이 너무 예쁘지..."
"아빠, 아빠 젊을 적엔 이렇게 꽃이 예쁜 거 알고 있었어?..."
아빠는 허허허 웃고 엄마는 꽃 같은 미소를 주름과 함께 웃는다.
보문호수를 산책하는 데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의 구성원도 다양했다. 젊은 연인들이 인생 샷을 찍기도 했고 어린아이들을 아장아장 걸리며 따라다니는 젊은 부부들, 노인을 휠체어에 태우고 밀고 가는 중년부부도 보인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의 그 시절을 떠올리게도 된다. 어릴 적 사진 한 컷으로 우리 기억 속에 새겨진 봄나들이의 젊은 엄마, 아빠도 마음속에 어른거렸다. 인생의 중간 정도에 선 내가 이런 마음인데 엄마, 아빠는 어떤 추억을 계속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언니가 구한 숙소의 방은 보문호수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뷰였다. 꽃과 호수가 보이는 밤야경을 배경으로 베란다에서 모두 함께 맥주를 마셨다. 여수 밤바다의 추억이 아니라 경주 밤 호수의 추억이다. 우리는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우리의 추억은 엄마, 아빠와의 스토리이지만 엄마, 아빠는 우리가 모르는 어릴 적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호기심이 생긴다. 우리의 부추김에 아빠는 슬며시 아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는 40년생,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주요 사건을 다 겪은 세대이다. 경남 산골에서 태어나 겨우 농사를 짓고 많은 아이들을 키우던 할아버지는 어렵지만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싶어 하셨다. 형편상 형제 모두를 공부시킬 수가 없어 큰 아들은 일손을 돕게 하고 둘째 아들인 아빠를 어렵게 근처 도시로 보내 공부하게끔 하셨단다. 어린 나이에 외할머니 댁에 얹혀서 외숙모의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학교를 다녔다. 하숙비로 매주 주말이면 쌀을 등에 이고 외할머니 댁이 있는 곳으로 산을 넘어가곤 했는데 그 산엔 늑대 울음소리에 뒤따라오는 여우도 있었다니 거의 전설의 고향 스토리이다.
어린 아빠의 모습을 상상하며 들으니 그때의 아빠를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어려운 가정 형편에 학교를 왜 가냐고 반대하며 가는 길을 막기도 했고,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 아빠의 아버지는 몰래 아들의 짐을 챙겨 학교로 보내려고 망을 봐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환경에서 공부한 아빠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빠, 아빠는 그렇게 힘들게 공부했는데 우리가 좋은 환경에서 학교 다니는 걸 보니 아빠 마음에 안 차는 일이 많았겠다. 그렇지 않았어?"
언니가 물었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어. 아빠랑 너네는 세대가 완전히 다른 걸?
아빠의 환경에 맞춰 아빠는 살았고 너희는 그런 환경이 아니니 또 너네의 생활이 있는 거지. 그걸 아빠 세대에 맞춰서 보면 절대 안 돼. 우리 손자, 손녀들도 마찬가지이지. 너네랑은 또 다르니 무조건 아이들 세대를 이해하려고 해야지 너네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돼."
아빠의 생각은 단호하고 나는 그런 단호한 생각이 지금껏 우리에게 해 오신 아빠의 태도와 똑같아 고개를 끄덕인다. 아빠는 그런 분이었다. 아빠는 우리에게 당신의 어린 시절의 힘듦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그저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분이었다. 그런 아빠가 이제서야 들려주는 당신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촉촉하게 만든다.
작가 박완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소설에 가슴이 먹먹해진 적이 많았는데 아빠의 이야기는 그에 못지않았다. 아빠의 어릴 적 이야기가 나의 현재의 삶의 뿌리가 되어주었다는 생각에 슬며시 힘이 생긴다. 아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어졌다.
"아빠, 아빠 이야기를 글로 남기면 어떨까.
그냥 기억에 남는 대로 아빠 이야기를 적어 두면 나중에 아빠를 기억할 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기억할 때 너무 좋을 것 같아..."
"아빠도 그런 생각을 한번 하기도 했는데... 아빠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도 너무 많은데 나까지 그런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을까 싶어. 게다가 또다시 떠올리면 부끄러운 기억도 많고..."
아빠답다. 하지만 난 아빠의 이야기를 놓칠 수가 없다. 아빠의 이야기를 하나, 둘 자꾸 물어 기록을 남기고 싶어 근질근질하다. 밤새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팔십 세의 아빠의 체력도 중년의 나의 체력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
잠자리에 누우니 아빠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우리의 삶이 아빠의 지난한 삶과 연결되어 펼쳐지고 또 나의 역사가 우리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우리의 우주가 신비롭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된다.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작고 소박한 아빠의 삶, 나의 삶이 우주 전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소중하지 않은 삶은 없다.
아빠의 이야기를 남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