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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리셋코치 Sep 12. 2020

술맛을 알아버렸다

당분간 혼맥 금지!!

그냥 마셨다

나이에서 오는 객기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자리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9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누구나 그렇듯 나의 20대 술 역사도 그렇게 시작됐다. 돌이켜 보면 나의 20대는 지금처럼 즐길거리가 많지 않았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선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만나면 으레 껏 호프집이나 노래방 혹은 커피 전문점이 다였다.


지금처럼 갈 곳을 쉽게 정할 수 있는 정보 검색도, 취미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선택의 기회도, 스스로의 강점을 드러내고 공유하는 다양한 SNS 플랫폼도, 볼거리와 경험 거리를 제공하는 서울의 문화도, 나의 재능을 사고팔 수 있는 플랫폼도,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끼리 술자리 없이도 가볍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만남의 즐거움도 없었다. 선택이 제한적이니 그냥 남들처럼 그렇고 그런 선택들을 별생각 없이 쫓아갔다.


딱히 다른 대안 없는 습관 반, 나이와 시대의 영향 반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고도 그런 생활은 오랜 기간 이어졌다. 20대 때에 비해 횟수는 현격히 줄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면 으레 껏 1차는 술자리였다. 30대에는 주종도 소주로 바꿨다. 좋아서라거나 취향이어서가 아니었다. 맥주는 너무 배부르고... 와인과 막걸리는 다음날 머리 아프니 남은 대안은 비싼 양주를 대신할 수 있는 만만한 소주였다. 그나마 다음 날 출근에 지장 받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대안이었다.


그러다 30대 중반쯤 이상한 자가면역 질환을 앓았다. 의사가 얘기하는 제한 항목에 술이 포함됐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정말 자발적으로 술이 당겨 마신적은 없었구나'라는 걸... 2년간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지만 딱히 아쉽지도 않았다. 만약 금지 항목에 커피가 있었다면 훨씬 더 괴로운 시간을 보냈을 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체력도 어느 정도 좋아졌다. 그리고 세상도 바뀌었다. 즐길 거리, 볼거리가 풍부해졌고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역량 계발에 에너지를 쏟았고 나를 채워줄 무언가를 하며 의미 있는 시간 보내기에 재미를 들이게 됐다.   

'1664 블랑'을 만나다

그. 러. 다. 1664 블랑을 만났다. 한참 사람들을 줄줄이 집으로 초대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던 때였다. 손님들이 빈 손으로 오기 그러니 우리 집 앞 홈플러스에서 다양한 캔맥주를 한가득 사 왔다. 지금은 편의점에서도 다양한 외국 맥주를 4캔 만원에 판매하지만 당시에는 대형마트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맥주는 배만 부르고 딱히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집어 든 맥주가 '1664 블랑'이었다. 이유는 그냥 패키지 디자인이 예뻐서였다. 지금은 디자인이 파란색으로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전체적으로 옅은 하늘색을 띤 패키지였다. 연한 하늘색에 빨간 마크가 유독 눈에 확 띄었다. 유리잔에 맥주를 따르는데 묘한 귤향 같은 게 풍겼다. 색깔도 너무 예쁜 옅은 황금색. 게다가 라테처럼 촘촘하고 부드러운 거품. 내가 익숙했던 쌉쌀함과 톡 쏘는 청량감이 아닌 너무나 부드러운 목 넘김까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코로 향기를 먹고 목으로는 차가운 부드러움을 넘겼다. 한 마디로 딱 내 스타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맥주를 선호하지 않았던 이유는 배가 부르다는 것 외에 라거 맥주 특유'의 톡 쏘는 청량감 때문이기도 했다. 맥주, 피자, 치킨처럼 뭔가 기름진 걸 먹지 않는 한 탄산음료를 잘 마시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30대 초반까지 내가 알고 있던 맥주는 이 원칙에 충실한 국산 라거 맥주 종류들 뿐이었다. 그나마 생맥주는 마셔줄 만했지만 그렇다고 500cc의 양을 감당할 만큼의 맛은 아니었다. '맥주 = 별로'라는 공식은 '1664 블랑'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맥주 맛을 알아버린 거다. 처음으로 술이 맛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집 앞 마트에 들릴 때마다 전에는 관심도 없던 수입맥주 코너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밀맥주가 내 취향임을 알았고 1664 블랑 외에 호가든, 에델바이스, 그 외 잘 기억나지 않는 다양한 밀 맥주들을 4캔씩 집어왔다. 물론 샤워 후 딱 한 캔이었지만 문제는 지속성이었다.


매일까지는 아니어도 이틀 간격으로 한 캔씩 마시는 기간이 점점 늘어가면서 어느 순간 살집 폭발했던 고등학교 때도 나오지 않았던 똥배가 느껴졌다. 난 살이 쪄도 얼굴살과 뱃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편이다. 안 되겠다 싶어 주 1, 2회로 횟수를 줄였더니 똥배가 들어갔다. '맥주=뱃살'이라는 공식이 허언은 아니구나 싶었다.  


또 한 번의 신세계, 수제 맥주 (feat. IPA)

그러다 2014 ~ 5년 경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태원을 중심으로 전문 수제 맥주 펍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직원이 추천해준 게 오렌지향의 무슨 에일 종류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이후 여러 가지 종류를 맛보려고 샘플러를 주문했고 이때 내 입맛을 확 사로잡았던 게 바로 IPA다. IPA는 India Pale Ale의 약자로 에일 종류 중 도수가 가장 높다. 보통 6.5 % - 7.5%인데 캐나다 밴쿠버에서 갔던 펍에서 8 - 9%의 IPA도 메뉴에서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수요 미식회 프로그램에서 주당으로 유명한 개그맨 신동엽이 IPA를 일반 맥주처럼 생각해 원샷했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는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을 정도로 양껏 들이켰다가는 훅 갈 수 있는 맥주다. 강한 쓴맛과 아로마가 특징이라 만약 첫 잔을 IPA로 시작했다면 계속 이것만 마셔야 한다. IPA의 강한 잔향이 혀에 남아 다른 맥주 맛을 느끼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다.


일본 맥주 퇴출과 근래 주세법 개정으로 가장 혜택을 본 게 수제 맥주가 아닐까 싶다. 편의점에서 수입맥주와 대기업 맥주가 차지했던 골든존을 다양한 수제 맥주가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몇 년 전까지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수제 맥주는 한 캔에 5-6천 원인 데다 크기도 작았다. 냉장고에 진열되어 있지도 않아서 직원에게 따로 문의해야 창고에서 겨우 꺼내 주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수제 맥주도 3캔 혹은 4캔에 만원이고 용량도 500ml로 수입맥주와 동일하니 소비자들이 지갑을 여는 건 당연하다. '경복궁 IPA'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편의점표 수제 맥주다. 편의점 브랜드에 따라 들여놓는 수제 맥주 종류가 다르니 수제 맥주 마니아로서 선택의 즐거움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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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술맛을 알아버렸다는 거다

몇 개월 전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처음 마셔본 '이네딧 담'을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 발견했다. 너무 반가웠고 동시에 그 사실에 반가워하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좋아하는 맥주 종류가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다. 난 물을 포함해 음료 종류를 딱히 즐기지 않는다. 그런 내가 마시는 두 가지가 하필 커피와 맥주다. 문제는 만성이 되어버린 외이도염과 지루성 두피염의 경우 피해야 할 항목에 두 개가 다 포함된다는 거다. '주의하라는 거 다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어... 독일에서는 맥주를 물처럼 마신다는데 난 그래 봤자 이틀에 한 캔이구만'하고 반드시 지킬 필요 없다는 당위성을 부여하며 버텨 보기도 했다.


근데 몇 번 실험을 해본 결과 술은 확실히 다음 날 증상을 악화시킨다는 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는 죽어도 못 끊겠고 그럼 남은 하나는 맥주다. 예전에는 맛을 몰랐으니 끊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맛을 알아버렸다는 게 문제다. 무언가 습관이 된 기간이 길어질수록 끊어내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귀와 두피는 소중하기에 당분간 혼맥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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