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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영 Aug 05. 2021

여름 단상, 결국은 사랑




아침이 되어 거실로 나왔다. 바람을 들이려 창을 열었다. 가을비 같은 여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의 우산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이내 멈추었다. 거실에 엎드려 조금만 책을 읽어야지 했는데,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그건 누군가의 투병이야기였고, 조금은 어두운 기분이 책의 면면에 스며들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덜컥 겁이 나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글을 잘 쓰는 분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동안 으슬으슬 춥다고 느꼈다. 가을 같았다. 아침에 창문을 열고 거실 러그 위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짧은 여름용 슬립만 걸치고 있었는데, 추우니 얇은 담요라도 덮어야 한다는 건 생각으로만 그칠 뿐이었다. 일어나면 안 된다. 일어나면 나는 이 풍요로운 아침의 여유를 끝내는 셈이다,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상하다, 이제 겨우 8월의 시작인데,라고 생각하며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맡기고 있었지만, 더 뜨거운 물에 반신욕을 하고 싶어졌다. 뜨거운 물이 좋아지는 건 흐르는 세월을 체감한다는 반증일까 하다가 그런 생각은 그만두기로 했다.


뭘 좀 먹어야겠는데 도통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질 않고, 냉장고 문을 서너 번 열고 닫다가 복숭아를 깎아 먹어야지 하고 생각만 한 채로 냉장고 문을 닫고 책상에 앉았다. 며칠 잠을 설쳤고 그래서 눈이 조금 피곤한데, 나는 얼른 A라는 일을 마쳐야 한다. 그럼에도 책을 읽고, 샤워를 하고, 음악을 듣다가, 책의 글귀를 살피고, 옮겨 적으며 시간을 보냈다. 낭비했다. 배달 앱을 열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해볼까 하고 오르락내리락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문득 내린 비와 찰나에 느낀 가을에 기분이 가라앉아있었다. 우울하다는 말은 사용하고 싶지 않다. 너무 흔한 말이기도 하고, 정말이지 우울한 말이기도 하다. 나는 그만큼 우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제주에 사는 초이는 여름이 되니 제주에 살고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말했다. 에어컨이 없어도 되고, 아무 때나 바다에 뛰어들 수 있으며 초이가 가르치는 제주도 초등학생들의 귀여운 제주어를 듣다 보면 제주에 있다는 사실이 더욱 실감 난다며. 초이는 제주에 산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왜 유독 올해 여름이 더 좋은 걸까. 그건 아마도 그녀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 거다. 짐짓 태연한 척하지만 분명 이건 사랑과 관련이 있다. 초이의 그는 그녀에게 아침 식사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이 어지러운 시국이 끝나면 다 내려놓고, 여행을 떠나자고 말했다고 했다. 초이는 내가 아는 가장 히피스러운 여행자이고, 세상을 몇 바퀴 돌았지만 여전히 몇 바퀴 더 돌기를 소원하는, 사람의 열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그 말이 더욱 달콤하게 들렸을 거라 여겼지만, 어쩌면 초이는 혼자 떠나고 싶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기엔 조금 늦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은 무참히 흘러가고 있으며, 그 사이 우리는 나약해지고 있다. 혼자라는 건 이제는 조금 우울한 일이다. 사랑에 눈이 먼다는 건 더 이상 촌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을 인정한다는 건 용기 있는 자의 결단이다.


그게 아니라면 세상에 눈이 멀어도 좋고. 그리고 음악을 듣자. 음악을 들으며 세상을 잊어도 좋으니까. 잠시 숨을 쉬기에 더없이 좋으니까.

비와 바람과 약간의 우울이 함께여서 더 좋은 건, 음악과 사랑 또한 함께이기 때문이다.





여름, 제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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