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장대같이 내리던 날. 우리는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식날 비가 오면 잘 산다고 했는데. 하긴, 기독교인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긴 하지.
이 이야기는 이제는 시간이 흘러 웃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엔 너무 끔찍하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그때여서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기도 하다.
결혼 4년 차 어느 여름날 남편이 회식을 한다더니 외박을 했다. 밤새 불통이더니 처참한 몰골로 아침에 퇴근했다. 잠만 쿨쿨 자는 남편을 깨워 어디서 무얼 했냐고 캐물으니 새벽 내내 경찰서에 있었다는 것이다. 꿈을 꾼 것 같다며 헛소리를 남발하길래 술이 덜 깼구나 싶어 그날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날 일상적인 보통날처럼 아이를 케어하고 집안 살림을 하고 하루가 저물어갔다. 지난밤 외박에 대해 잊혀갈 때쯤 퇴근 시간이 되어 남편이 사색이 된 얼굴로 집에 들어오더니 잠시 방에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순간, 덜컥했다.
참, 여자의 직감은 무섭다. 조용히 이야기를 하자는 남편의 말에 무게가 느껴졌고 전날 한 말들이 불현듯 한꺼번에 떠오르더니 헛소리가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가 저절로 되었던 순간이었다.
"여보, 내가, 운전을 한건 아닌데, 대리를 부르고 기다리고 있었거든, 비도 오고, 나 진짜, 택시들이 줄지어 들어오길래, 차를 잠깐 빼려고 했는데, "
남편은 살짝 말을 버벅인다. 기가 죽어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와 매끄럽지 못한 억양.
남편이 그 해 초에 이직을 했고 옮긴 회사는 회식이 잦았다. 그 당시는 한참 코로나로 다들 예민해있을 때였고 분야가 영업도 아닌데 회식이 잦은게 아내인 나로서는 매우 큰 불만이었다.
그렇구나. 회식으로 매번 날 힘들고 속상하게 했던 회사가 드디어. 당신이 갖고 있는 유일한 치명적인 단점인 술이 드디어. 우리의 부부싸움 주된 원인인 술이 드디어 일을 냈구나. 신기하게도 마음의 준비가 저절로 되어서인지 나는 생각보다 차분했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화가 나기보다는 자포자기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사람은 너무 큰 일이 벌어지면 오히려 차분해진다는데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여보, 괜찮아. 돈은 또 벌면 되고. 운전은 내가 하면 돼.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
그때는 그렇게 하면 괜찮을 줄 알고 그렇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너무 불안정해 보이는 남편을 안심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여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
남편이 바들바들 떨면서 울었다.
음주운전이다. 말로만 듣던 음주운전을 범했다. 이젠 법이 예전 같지도 않고 강화되어 범칙금도 높고 징역살이도 한다.
남편은 부인하지만 알코올 농도가 0.208이상인 상태로 매우 높은 수치였고 만취상태였다. 하필이면 접촉사고 상대가 택시기사라니. 택시기사에 대한 선입견이긴했지만 정말 남편의 실수였고 상대방 차량, 남편 차량 모두 흠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택시기사와의 합의가 가장 시급했다. 합의가 되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보험사와 걸려있는 자차처리가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약식재판이 남아있었다.
뭐, 합의과정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본인은 합의금을 합리적으로 부르는거고 쉽게 합의를 해주는 것이니 고마워해라 라는 식의 온갖 생색을 다 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혀 다치지 않은 사람이 병원에 며칠씩 입원해서 차량도 멀쩡한데 우리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하긴 했다. 그래도 음주운전을 한 죄인이고 상대방의 합의가 없으면 최악의 상황이기에 무작정 억울해할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택시기사의 말처럼 합의금 금액을 터무니없게 부르지는 않아 원만한 합의가 되었고 보험사와도 잘 처리되었다.
이제 남아있는 약식재판을 위해선 남편 본인의 반성문, 믿을만한 사람의 탄원서가 필요했다. 아내로서 나는 눈물 나는 탄원서를 작성했다.
저희에게는 14개월 된 딸이 있고 남편은 평소에 근면성실하며 음주운전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앞으로 음주운전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다는 식의 내용을 구구절절 눈물 나게 작성했다. 최선을 다해 글을 써내려갔다.
여러 기존 케이스들을 알아본 결과 남편의 경우는 초범이고 운전거리도 3m였으며 택시들이 밀려 들어와 잠시 차를 빼려던 의도였기 때문에 벌금형이거나 운이 나쁘면 집행유예 정도를 예상하였지만 집행유예가 되면 사회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이 되지 않아 우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약식재판을 준비해야했다.
동시에 난 남편의 멘탈도 신경 써야 했다. 남편은 평소에 멘탈을 잘 부여잡는 편이지만 이런 큰일에는 굉장히 심약한 사람이다. 어찌 보면 나와는 반대의 성향으로 나는 자잘한 일에는 예민한데 큰 일에는 오히려 덤덤한 편이다. 다른 얘기지만 그래서 우리가 부부가 아닐까. 어쨌든 나는 남편이 이 일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도록 아내로서 최선을 다했다.
운전면허증은 이미 취소처리가 되었고 2년간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없는 자격박탈자가 되었다.
모든 서류를 제출하고 약 3개월 뒤 재판이 열렸고 남편은 죄수처럼 재판장을 다녀왔다.
제발 벌금형으로 끝나게 해주세요.
다행히 우리는 벌금형을 받았고 범칙금 1000만 원을 내야만 했다. 당시 남편이 운전했던 출퇴근용 경차를 팔고 그간 모아뒀던 돈을 합하여 범칙금을 지불했다.
돈은 다시 벌면 그뿐 아닌가.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고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운전면허 역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취득하면 될 일이고 아내인 내가 운전경력 10년 차니까 내가 운전하면 우리의 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 또 괜찮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때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을 줄 알았는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제부터 본 게임이란 걸 우리는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