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테스형 우리 제법 잘 어울려요

몸을 위해 뭔가를 해야 했다

'아직도 운동 안 해요? 쯧쯧.' 아무도 내게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인생의 모든 전광판이 운동을 가리킨다. 곳곳에서 운동이 출몰한다. 내가 좋아하는 티브이 시청할 때나 친구들과 수다를 즐길 때도 어김없이 운동이 끼어든다. 중년 연예인의 건강 체험담과 추천 운동을 보고 있으면, 운동이 '나랑 놀자. 언제까지 버틸 건데?'라고 말하면서 내 몸을 아래위로 훑더니 입 모양을 삐죽거리며 윙크를 해댄다. 친구는 만 보 걷기를 추천하며 만 원 내기를 하자고 한다. 다들 내게 왜 이러는 거야!

세상이 이렇게까지 운동하라고 외치는데 더는 못 듣는 척할 수도, 나와는 안 어울린다며 선 긋기도 할 수 없다. 뒤로 물러나기만 했더니 등이 벽에 붙어버린 느낌이랄까.

그렇게 운동 압박이 방송 매체와 주변 사람들에게서 전방위로 쏟아지던 어느 날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띠띠띠 비밀번호를 누르려하는데, 문손잡이에 전단이 붙어있었다. '어? 아직도 전단이?' 그냥 떼서 버리려 하다가 '닥터 필라테스!' 그 한 문장이 확대돼서 들어왔고, 닥터와 필라테스의 조합이 궁금해서 전단을 펼쳤다. 닥터랑 필라테스라.

오픈 기념 할인도 반가웠지만, 일반 필라테스가 아닌, 의사의 처방전 같은 필라테스라니! 확 끌렸다. 글쓰기 시작하고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허리 통증이 생겼기 때문에 닥터, 캐어~이런 단어가 붙어있는 모든 것에 관심있다는 걸 영악한 운동이 알아채고 공격을 해 온 것 같다.

운동의 전략은 맞았다. 이미 나는 전단에 현혹되고 있었다. 맞다 난 홀려버렸다. 병원도 아닌데, 필라테스를 시작하면 처방전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아,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운동하지 않고 버틸 수가 있나? 다음 날 바로 등록했다. 운동 이 녀석, 이제 속이 후련해? 내가 너랑 놀아줄게!

유명 미녀 연예인이 필라테스 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경이로운 몸동작에 감탄하곤 했다. 게다가 미녀들은 한결같이 몸매 관리에 필라테스가 좋다고 했으니까. 나도 이제 미녀 되는 건가. 등록만 했을 뿐인데 이미 난 필라테스의 여신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 세수하러 욕실에 가니 여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업무에 지친 내가 '어쩌라고'하는 표정으로 등장했다.' 좀만 기다려라. 거울아, 네가 원하는 여자를 데려다줄게.'

드디어 첫 수업 날.  필라테스와 나의 첫 만남은 내 몸의 문제와 마주하기였다. '등이 굳었다 숨을 마시기만 하고 쉬지는 않는다.' 등등 내 몸의 문제들을 강사님은 지적하셨다. '아, 나 정상이 아니었어.' 그중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엉덩이 기억 상실증이다. 의자에 오랜 시간 앉아 일을 하거나 생활하는 직장인이나 학생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질환들 중 하나로 의자병이란 애칭도 있다고 한다.

내 엉덩이가 근육 쓰는 법을 잃어버렸다고? 퇴화한 꼬리에 이어 엉덩이는 그저 쿠션일 뿐이란 말이야? 이럴 수가. 나는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중얼거렸다. 엉덩이 기억 상실증.... 엉덩이 근육... 기억 상실. 이대로 살 순 없으니 필라테스 하자. 넌 나의 운명이었어.

필라테스는 체어, 바렐 등 다양한 과정이 있고, 과정마다 다른 기구를 활용해서 흥미진진했다. 호흡과 스트레칭 그리고 근력운동이 조화를 이뤄서 초보자도 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초보자도 따라 할 수 있다고 해서 쉬운 운동은 아니다.  제대로 자세를 갖추기 위해 애쓰다 보면, 온몸이 땀범벅이 된다.  어렵지 않은데 어려운 운동이다. 끝나고 나면 온몸이 쑤시고 몹시 피곤했다. 제법 운동이 됐다.

결론은 난 필라테스가 재밌다. 지루한 동작을 반복하는데도 재밌다. 고요한 역동성! 내가 필라테스에 붙인 별칭이다. 정적이지만 충분히 활동적이라서 나랑 잘 맞다. 아니, 엉덩이 기억 상실증을 벗어나려면 이 운동이 필요하다. 필라테스를 계속할까? 일주일 남은 등록기간 동안 고민해 봐야겠다. 필라테스, 제법 나랑 잘 어울리니까.

우리가 친해지면 필라테스 형이라고 불러야겠다. 형, 나 필라테스 계속하면 몸매가 예뻐질까? 앗, 형이 바로 대답한다. 자세나 바르게 해.

'20대부터 할걸!' 하는 욕심을 준 최초의 운동 필라테스. 내 인생에서 너무 늦게 찾아온 너와의 인연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 볼게. 운동, 매일 하는 거였어. 나의 서술어가 하나 더 바뀌고 있어서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