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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Feb 28. 2021

37-23=1

너와 나 사이의 공식


“처음 날 봤을 때 어땠어?”


“음... 수준 있어 보였어.”


“마음에 들었다는 거야?”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인정만 했다.

말을 아꼈다.

커피를 연거푸 마시며 말보다 깊은 기억으로 숨어들었다.

‘이상적인 대학생 같았어.’ ‘내가 있는 세상과는 다른 그러니까 정원 있는 이층 집에 살며 피아노를 잘 치고 허리가 가녀린 긴 머리 여인과 홍차를 마실 것 같았어.’ ‘쳇, 소개팅은 망친 듯’

이상형을 만난 기쁨과 동시에 평범한 나를 좋아할 것 같지 않다는 아쉬움이 첫인상이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내가 기억났다.

그때처럼 감정을 아끼는 건지, 진심을 아끼는 것인지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어려운 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침묵이 길었나 보다. 불편했는지 톡톡톡 그가 탁자를 두드린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는데, 찰칵. 값비싼 카메라로 대책 없이 나를 찍었다.


“뭐야? 갑자기 찍으면 어떡해?”

따져 묻는데도 그는 신경 안 쓰고 턱으로 커피잔을 가리킨다.


"쓸 텐데"


커피는 연거푸 마셔도 커피 맛일 뿐이다. 그래도 자꾸 홀짝거리는 건 그것밖에 할 게 없는 어색함 때문이다 그런 건 눈치채지 못하고 찍는다는 말도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다니! 불쾌했다.

갑자기 누른 카메라 버튼 속도만큼 깊게 찌푸린 인상이 사진에 담겼겠지?

"사진 보여 줘."


그는 또 말이 아닌 고개로 답했다.

좌로 우로 고개를 돌려대면서 입술은 왜 삐죽 내민 것인지. 그 모양새가 미운 오리 같았다


"안 보여준다고? 웬 거절? 내 사진 갖고 네가 왜? 사진기만 네 거지 내가 찍힌 사진은 내 거야."

어이가 없어 쏘아붙였지만 안 보여주는 이유를 따져 묻기도 귀찮았다.

사진을 안 보여줘도 좋으니, 사진이 이상하게 나왔으면 지워달라고 하려다 그만둔다.

한동안 사진기 속 사진을 요리조리 살피는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좌로 우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이 사진을 보여 주지도 지우지도 않을 걸 알려줬기 때문이다.

대신 이제야 물어야 할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어쩐 일이야?”


“근처에 사진 찍으러 오게 돼서”


“여전하구나”


여전하다는 말엔 다른 두 감정이 있다. 한결같음에 박수를 보내는 것과

'역시, 넌 그때와 달라진 게 없구나. 지금도 넌 또 내게 상처를 주는구나'란 실망을 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그와 나의 처음은 피터 팬의 밤 비행처럼 신나고 환상적이었다.

이상적인 대학생인 그와 평범한 나.

피아노를 잘 치는 여자를 만나고 싶던 그와 피아노를 못 치는 나.

깊고 구체적으로 아는 그와 얕고 두리뭉실하게 아는 나.

서로 다른 우리는 연인이 안 될 거로 생각했는데, 뜻밖에 첫 만남 5분이 지났을 무렵 그가 선전포고 했다.

"우리 사귀자."

반짝거리는 눈이 블랙홀처럼 강렬하단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첫인상과 달리 소개팅은 사랑으로 골인했다.

사랑은 언제나 눈부시게 시작한다.

그와 걷는 거리는 수십만 개의 조명으로 밝혀 놓은 듯 찬란했고 그와 있을 땐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첫인상에서 느낀 대로 이상적인 그의 이상형과 나는 달랐다.

그는 나를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고 사랑과 이해 사이에 생긴 빈틈은 점점 커졌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

그 거리를 '그럴 거야'란 괴물이 차지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잦아지면서 대화를 멈추고 짐작만으로 서로를 대하곤 했기 때문이다.

'오늘 눈 오는데 데이트하자고 할까? 바쁠 거야. 그럴 거야."나는 그를.

"집에 일찍 들어가라고 했는데 또 늦게 갈 거야. 그럴 거야." 그는 나를.

 이해 못 하는 서로의 행동만큼 짐작만 했다.

그러다가

"이젠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럴 거야."

나도 그도 짐작했고 헤어졌다.


나에게 그는 나보다 중요한 할 일이 많은 남자였고, 그에게 나는 그 보다 만날 사람이 많은 여자였다.


사진 촬영을 가기 전에 잠깐 데이트하는 게 싫어서 헤어진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하다니.

“근처에 사진 찍으러 오게 돼서”라고 한 그의 대답이 버퍼링 걸린 노랫말처럼 불협화음으로 귓가에 맴돌았다.


14년 만에 갑자기 다시 찾아온 그를 덥석 만난 게 불쾌해졌다.

나를 만나기 위해 다른 도시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진 촬영을 왔는데 근처에 내가 있었던 거다.

잠깐이라도 23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피터 팬과 웬디의 눈부신 모험을 떠올렸다니. 바보 같았다.


나는 또 짐작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 생긴 '그럴 거야'라는 짐작의 공식을 깨뜨릴 반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달라서 헤어진 것만은 아닌 더 큰 이유가 드러났을 뿐이다.

14년 만에 찾아온 그의 여전한 한 마디에서 사랑이 끝나야 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

이 모든 감정을 담아 그의 눈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응, 이제 너와 내가 사랑한 이유도 헤어진 이유도 알겠어.

너와 난 사는 곳이 다른 게 아니라 보는 곳이 달랐어. 넌 너만 보고 난 나만 본 거야. 우리가 서로를 본 적이 있을까? 내 근처에서 사진 촬영 잘하고 너의 세상으로 돌아가서 잘 지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는데 여전히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만 들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의 눈과 마주쳤다. 처음 그토록 빛났던 눈. 그리고 흔들리는 마지막 눈.


처음 그 빛으로 기억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오늘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곧 야간 사진 촬영을 떠날 것이다.

카페 문을 닫고 나오니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다. 집까지 걸어가도 좋은 시간이었다.

“걷기 딱 좋은 시간인걸.”


그와 나의 처음은 피터 팬의 밤 비행처럼 신나고 환상적이었는데, 그와의 마지막은 그냥 밤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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