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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Jan 21. 2021

디지털 디톡스, 해독 레시피가 있나요?

내게 권장해야 할 것은 내가 선택한다

Good Finder의 시선3


새벽 3시 38분

오늘도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느닷없이 눈이 떠지면 밤새 TV 소리에 시달려온 귀가 항의를 시작한다.

불쑥 들리기 시작하는 소리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것일까.


“좋더라고요. 일단 매번 간수치가 몇 배 높게 나오다가 이번에는 정상범위기준의 근사치로 나왔어요.”


좋아? 뭐가 좋다는 거야? 

‘좋다’라는 서술어에 현혹되어 청각에 이어 시각까지 빠르게 점령당한다. 


TV를 끄지 않은 채 잠들기 시작한 후 자주 새벽에 깨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몇 분 뒤척이다 다시 잠들곤 했다. 그런데 오늘 난 ‘좋다’라는 말에 솔깃해서 잠을 몰아내고, TV프로에 관심이 쏠려버렸다. 


아~ 디톡스!

들어본 단어였다. 

디톡스 즉, 해독요법에 관한 건강프로였다. 

일반인의 경험을 다룬 인터뷰가 끝나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라고 여겨지는 분이 나타났다.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흰 가운은 신빈성을 상징한다.

그러니 그분은 중요한 정보를 얘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는 챙기고 보는 거야.'라는 조건반사에 충실하게 핸드폰을 들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일간신문 건강 기자라도 된 듯, TV 속 의사의 인터뷰를 촬영하면서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새벽에 깨어 요즘 말로 득템 한 기분이었다.


“해독요법 약물 중에 오일 성분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십이지장 점막들을 통과할 때 콜레시스토킹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담즙이 쏟아지게 하면서..... 중략... 해독의 기본은 금식과 절식입니다.

몸에 독성물질이 쌓이는 것은 환경오염, 스트레스, 중금석, 가공식품 등... 중략... 그래서 독성물질을 빼내는 것이 해독, 즉 디톡스.... ”

귀는 예민하게 한 토막 한 토막 새겨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정보는 챙기고 보는 거야. 그런데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시계는 새벽 3시 51분

핸드폰에 저장된 건강정보가 몇 개나 될까?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길고 깊은숨을 내어 뱉었다.

숨 뒤로 한숨 같은 한 마디가 따라 나왔다.

'이건 디톡스가 아닌 독 아냐?'


이 새벽에 방 안에 홀로 앉아 휴대폰으로 TV를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 내 눈동자 안으로 투영되어 들어와 버렸다. 다시 한번  숨을 고른다.

정작, 디톡스 해야 될 것은 지금의 내 모습인 것만 같았다.

정작, 해독되어야 할 것은 지나친 정보들인 것만 같았다.


해독 주스 열풍의 시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해독을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맛있는 0석들, 집밥 0 선생, 생0 정보통과 같은 여러 프로에서 고칼로리, 고단백 음식으로의 여행을 권장한다. 우리의 식탐을 부채질한다. 

가족과 함께 하는 소박하고 단란한 저녁 밥상보다는 맛 집을 찾아 외식하도록 독려하면서, 한편으로는 디톡스를 위해 금식과 절식을 권하고 해독 주스를 먹게 만든다.

우리의 주방을 된장 냄새와 마늘 두들기는 소리보다는 해독 주스를 삶고 유기농 샐러드를 버무리고, 올리브오일로 가글링을 하게 만든다. 

식탐 권장 시대인가? 디톡스 권장 시대인가?


TV 등 방송 채널의 위용은 우리의 뇌도 위장도 주머니 사정도 점령해 버렸다. 

디톡스를 해야 하는 이유와 어떻게 디톡스를 해야 하는지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며 아침 식탁에서 우리의 건강을 챙기게 하면서, 저녁엔 '맛집 탐방'프로를 보면서 치킨을 주문하게 만든다. 

아침엔 디톡스, 저녁엔 맛 톡스.

난 그 시소의 양 끝에서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있다.


이렇게 '좋은 것 소개하기'는 먹을거리에서 시작해서 더 좋은 화장품, 더 좋은 교육, 더 좋은 것을 소유하는 방법까지 권장해 주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동시에 따르고 있다.  

오늘 저녁 식탁에 무엇을 올릴지를 가족과 의논하지 않고, 각종 정보에서 검색을 하고 있지 않은가.

친구가 헛배가 부르고 자주 배가 아프다고 하면, 

"디톡스 해야겠어. 독이 쌓여서 그렇데, 우리 해독주스 먹자."

의식주 곳곳에서 선택을 리더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각 종 방송매체가 아닐까?

‘비우세요’라고 추천하며 수많은 건강프로그램에서는 해독 레시피를 쏟아대고, 그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인지 알기도 전에 디톡스를 선언하며 해독 주스를 주문한다.


결국 내게 필요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찾아서 활용 및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나를 리드하는 시대] 아닐까? 


스스로의 시선과 취향도 놓친 채, TV매체의 시선에 따라 보고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인생의 시간은 TV, SNS 정보들을 뒤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작 필요한 것은 브로콜리, 당근, 양배추, 토마토를 물에 삶고 사과와 바나나를 넣고....

그런 몸을 위한 해독 주스보다 내 삶에서 비워내야 할 것들을 찾아내 분리해 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의문을 던질수록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청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뇌는 디톡스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나 보다.

몸의 디톡스도 중요하지만, 뇌의 디톡스가 더 필요하게 다가왔다.

먼저, 정보를 해독시키겠어!


새벽 4시 05분

나는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핸드폰에 저장하기 위해 의사 선생님의 영상을 찍고 있는 것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핸드폰을 끄고, TV를 껐다.

그리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있는 곳과 나, 자신의 매무새를 살펴본 것이다.

매체가 아닌, 실제의 나를 들여다보았다.


새벽 4시 11분

커피를 내렸다. 핸드폰 대신 수첩을 꺼내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을 찾아 쓰기 시작했다.

어디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왜 굳이 버릴 것을 쓰기 시작했을까?

내 핸드폰에 저장된 무수한 정보를 지우듯 내 삶 속에 저장되어 있는 과용과 과욕의 정보들을 지워서 꼭 필요한 것만 취하고 싶어 진 것이다.

몸 보다 머릿속의 디톡스를 시작했다.

내 삶에 필요한 해독 주스 레시피는 무엇일까?

디톡스? 그래, ‘인생 여행 필수 목록’을 정리하기로 했다. 

필수품이 아닌 사치품이나 불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그게 독소가 될 테니까.

시청자로 정보수집에 여념이 없던 내가 수첩 위에 인생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 여행 필수 목록’을 쓰고, 지우고 하며 새벽은 아침을 맞이했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줄여가길 서너 장쯤 했을까. 목록이 한결 줄어들었고 이 정도면 충분히 필요한 것과 있어야 할 것들로만 채워진 것 같았다. 줄어든 수첩의 목록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생 무게'가 가벼워진 것 만 같다.

새로운 목록으로 채워진 인생 가방은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인생은 짐이 많아서 버거웠던 지난 날 보단 즐기며 걸어갈 수 있겠지?


디톡스 권장 시대에 살면서 00누설, 나는 0신이다, 0의 비밀, 이런저런 신의 경지에 이른 듯 보이는 사람들의 정보에 나를 내어 맡길 듯이 정보를 퍼 안았지만 정작 나는 그것을 다시 본 적도 없다.

그저 퍼 담기만 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저 따라가기만 한 길도 얼마나 잦았을까.


새롭게 꾸려진 여행 가방이 마음에 쏙 든다.

오늘 아침 커피는 유난히 맛있다.

가장 커피 맛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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