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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Apr 25. 2023

혼놀의 평온함 - 서재

언젠간 맞이할 은퇴를 앞두고 최저 시급의 노동만을 하며 혼놀, 혼밥, 혼술에 익숙해지려는 요즘 일상이다. 5도2촌(5都2村) 생활이 바뀌고 있다. 매월 일주일은 시골에서 지내는 데 언젠가는 반도반촌(半都半村) 생활이 될 것만 같다.     


시골집에 올 때는 벌레를 무서워하는 아내를 광주에 두고 나 홀로 내려온다. 시골집은 혼놀을 만끽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이번주에는 혼놀을 지속하기 위해 시골집에 쌓아둔 책을 정리하기로 했다. 나만의 서재를 만들려는 의도이다.     


나는 꽃밭을 가꾸듯이 책장을 가꾼다. 독서에 앞서 책을 소장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 독서는 그 이후의 일이다. 꽃을 보듯이 책을 보면서 장서의 즐거움을 즐기는 편인데 허세라면 허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일까? 주유소에서 만땅의 기름을 넣거나, 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책장에 꽂고 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다. 든든함마저 느낀다. 목월 시인은 ‘산이 날 에워싸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라’고 했다지만, 나는 ‘책장이 날 에워싸고 장서를 보며 혼술을 즐기라’고 하는 것만 같다.     


시골집에 서재를 만들기 위함으로 쇼핑몰 홈페이지에서 5만 원 전후의 책장을 검색했다. 느낌으로는 오백 권 정도 들어갈 것 같은 2미터 높이의 책장이 눈에 띄었다. 천 권 정도를 생각하여 두 개를 주문했는데 2주 만에 도착을 했다. 책장을 기다리느라 본의 아니게 2주간 시골집 재택근무를 하였다. 나의 두 가지 불찰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고흥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시골집에서도 온라인 주문을 하면 2~3일 내에 주문품이 도착한다. 하지만 책장은 부피가 크기에 택배가 아닌 일반화물로 배달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특히 시골일 경우, 중간 물류 센터에서 비슷한 거리의 화물이 어느 정도 모여야만 배달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게 나의 첫 번째 불찰이었다. 두 번째 불찰은 택배료 3,000원의 10배인 화물료 30,000원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책장이 두 개였기에 60,000원을 추가 지불하여 이번 책장 구입에는 총 200,000원 가까이 지출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2주간 기다리지 않고 당일 무료 배달되는 읍내 가구점에서 사는 건데 말이다. 건성의 정보는 이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막상 책장이 도착하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장르 분류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적으로 쌓여있는 책을 서둘러 꽂기 시작했다. 책을 꽂는 데 재채기가 자주 나왔다. 세월과 함께 묻은 먼지의 영향이었기에 마스크를 하고 헉헉대며 책을 꽂았다. 책을 꽂는 작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충분할 것 같았던 두 책장에 550권 밖에 들어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에어컨 뒤편 구석에 쌓아둔 책과 마당 뒤편 박스에 쌓아둔 책도 있는데 말이다.      




잠시 이마에 땀을 닦고 캔맥주를 마시며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장르별로 정리가 안 된 상태이기에 낡은 표지를 우선적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의 2~30대에 읽었던 책들이다. 그중에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언젠가 내가 쓴 글의 소재로 썼던 경제부총리이자 소설가였던 김준성의 <돈 그리기>였다. MBC 베스트셀러극장에서 단편극으로 방영되기도 했던 소설이기도 했다. 책 표지에 흙먼지가 묻어 있어 조심스레 닦아 보는데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첫 직장 때인 20대에 읽은 책의 얼룩이니 쉽게 지워질 리 있겠는가.

      

https://brunch.co.kr/@erre-kim/297     


맥주 한 캔을 다 마시고 PC를 켠다. 쇼핑몰 홈페이지를 열어 추가 책장 주문을 하려다 말고 그만둔다. 배달 기간과 추가 화물료가 아깝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양보다 질을 생각했다. 선택과 집중도 생각했다. 이번 두 책장에는 나의 관점과 취향에 어울리는 책만 꽂기로 한다. 어떤 책을 퇴출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어렵지 않다. 첫 번째는 정치인이 쓴 책이고 두 번째는 돈 버는 내용의 책이다. 다음으로는 자기계발서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보다 더 빠르게 몸이 움직인다. 퇴출되는 책을 빼낼 때마다 까닭 모를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왜지? 갑의 희열이자 젊은 날의 일탈을 꽁꽁 묶었던 복수의 희열인가?     




1/3 정도의 책이 퇴출되었다. 뒤돌아서 퇴출된 책들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방금 신나게 빼내었던 책이지만 한때는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들이다. 고독과 절망의 친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별을 고해야 할 때가 되었다. 갑의 희열이 갑자기 서글픔으로 밀려온다. 나머지 책장 정리는 지금의 서글픔이 사라진 뒤에나 해야 할 것 같다. 잘 가거라 나의 책들아. 그리고 고마웠어.


냉장고를 열어 두 번째 캔맥주를 꺼내 마신다. 장서의 즐거움이 뜻밖에도 이별의 서글픔으로 바뀌어버렸다. 영원한 즐거움은 없나 보다. 그래서 행복한 위한 노력에만 몰빵하지 말라고 했던가?  아무튼 이별이란 참 쓸쓸한 일이다.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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