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왈츠 B단조
에디슨의 전구발명 이후 도시에서는 광공해 영향으로 밤하늘의 낭만이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저녁의 금성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정도이다. 하지만 시골집에 오면 제법 많은 별들을 볼 수 있다. 소싯적에 보았던 별의 수보다는 적지만 제법 많은 별들이 보인다. 날씨 좋은 날에는 흐르는 듯한 은하수도 볼 수 있다. 겨울에 잘 보이는 대표적 별자리인 오리온자리도 시골에서는 여름에도 크고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요즘은 개밥바라기별이 유난히 밝게 빛날 때이지만, 장마로 인해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응원하는 프로야구는 초반 실점에 암울한 예감이 들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마당으로 나오니 시원한 장맛비가 쏟아진다. 우산을 쓴 채 하염없이 슬리퍼를 적시는데 광주에도 장맛비가 내리는 모양이다. 스윕패를 염려했던 프로야구가 우천 취소 되었다는 아내의 메시지가 울린다. 응원하는 입장에선 다행이라는 독백이 흘러나오지만, 우천 취소만 안 되었으면 대역전승을 했을 거라는 메시지를 아내에게 보낸다.
잠시 후 비가 그쳤다. 혼밥을 먹고 커피잔을 들고 다시 마당에 나오니 옅은 비구름이 지나간다. 훈풍에 얼굴을 대고 비구름에 시선을 옮긴다. 인도양 밤하늘에 피아노곡이 서럽게 흘렀던 영화 <연인>의 장면이 생각난다.
<연인>은 콩쿠르상을 수상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이다. 베트남에서 여학교 프랑스 소녀와 30대 중국인 부호와의 사랑 이야기다. 어찌 보면 비련의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뒤라스의 첫 경험 이야기 같기도 하고. 영화에서는 하얀 수트와 올백으로 넘겨 빗은 양가휘의 관능적 탐닉이 숨을 막히게 했다. 불장난으로 치부하기엔 양가휘의 눈물이 예사롭지 않았다. 인도양 밤하늘의 어두운 별빛이 쇼팽의 왈츠 B단조를 타고 흐를 때, 뒤라스 역인 여주인공의 흐느낌과 양가휘의 눈물이 오버랩되었다. 그제사 두 사람의 서글펐던 사랑의 진정성에 나는 마음 아파했다.
(쇼팽의 왈츠 B단조가 흐르는 장면) - 유튜브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여성작가로서 80세가 넘도록 평생을 사랑의 테마 속에서 살았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서 삶을 마쳤다. 사랑 이야기에 혹하지 않는다는 자칭 “쎈 언니”를 자임하는 <여자의 독서>의 저자 김진애는 말했다. 뒤라스의 이야기 뒤에는 ‘사랑은 언제나 옳다’ 라는 맺음이 있다고.
나는 이 영화에서 ‘사랑은 언제나 옳다’라는 확신은 갖지 못했다. 사랑에는 분명 국경이 존재했다. 신분의 벽도 존재했다. 현실의 아픔이라고 치부하기엔 답답함이 앞섰다. 그저 쇼팽의 왈츠 B단조에 나의 마음을 묻었을 따름이었다.
이 영화에 쇼팽의 왈츠 B단조를 삽입한 배경이 무얼까. 쇼팽은 어떤 분위기에서 왈츠 B단조를 완성했을까. 철의 여인이자 여걸이었던 연인 조르주 상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왈츠 B단조가 상드를 만나면서 작곡한 곡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상은 할 수 있겠다.
꽃을 꺾기 위해 가시에 찔리 듯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견디었다는 조르드 상드. 그녀는 왜 쇼팽을 감싸 안았을까. 자신의 남성편력으로는 충분히 예견되었을 미완성 사랑의 결말을 추측했을 텐데 말이다.
사랑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녀는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쇼팽의 생애와 음악에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아름다운 쇼팽의 피아노곡을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 홀로 시골집에서 오락가락 장맛비에 어울리는 쇼팽의 왈츠 B단조를 감상해 본다. 냉장고에 맥주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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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왈츠 B단조) -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