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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하 Mar 25. 2022

뿌리, 존재의 맞닿음

불휘 깊은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노자께서 말씀하셨다. “삶은 논리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논리로 삶을 이해하고 안다고 생각해.” 교과서 같은 말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생각하다가 광고 하나를 보게 되었다. ‘불휘 깊은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아, 그래, 이 문장은 오랫동안 논리로만 이식되었던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내 키만큼 자란 나무를 분갈이하다가 알게 되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정말 바람에 아니 흔들리는지, 아니 휘는지 만져보기 이전에 당연히 뿌리만 깊으면 된다고 생각하였지만 무작정 한 곳에 고집불통처럼 뿌리만 내리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인제 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한 화분에서 뿌리를 내린(대자연에 자란 나무의 뿌리를 직접 만져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무를 화분에서 빼내려 했다. 뿌리와 흙이 하나가 되어 화분에서 나무가 빠져나오지를 않았다. 온몸의 진이 쏙 빠지도록 힘을 많이 들여야 했다. 물론, 뿌리를 깊게 내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조건 깊게 내려서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는 큰 뿌리 말고도 작게 보이는 잔뿌리, 보일락 말락 하는 실뿌리, 잘 안 보이는 솜털 뿌리까지, 뿌리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이다. 솜털 뿌리들은 너무 여려 살짝만 건드려도 상처가 나고 잘려 나가서 조심조심 살살, 힘의 강약으로 리듬을 주면서 빼내야 했다. 진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고, 아하, 그렇구나! 인식되는 그 무엇이 뿌리들과 함께 화분에서 솨르르 빠져나왔다. 솜털 뿌리들이 바로 나무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양분을 끌어올리는 생명의 가느다란 떨림이라는 것. 끊어질 듯 가느다랗고 보드라운 고것들이 고운 흙 알갱이와 만나서 전기적 마찰 같은 사랑의 양분이 만들어지고, 그 양분들을 끌어올려서 줄기를 만들고 아가 손 같은 이파리를 만드는구나. 이내 줄기와 여린 이파리는 공기를 만나고 바람을 만나고 태양을 만나서 생명을 순환시키는구나. 그렇게 생명을 순환시키며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들은 모두가 그토록 여리고 약하고 부러지기 쉬운 존재들이 맞닿아서 생명을 살린다는 사실이 어둠 속에서 눈을 뜨듯이 섬광처럼 내 가슴을 가로질러 갔다.  


이 인식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적용되기는 그 크기가 꼭 같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왜 그토록 어여삐 여기고 더듬더듬 찾아가는지, 그 이유가 이토록 맞닿음으로써 생명의 에너지를 가득 끌어올리는 것이라면, 물질이나 시간에 쫓겨 가는 삶이 아닌, 보이지 않는 본질을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겠다. 따뜻하고 포근한 포옹, 사소하지만 정감 어린 느낌 하나의 전달, 신뢰를 주는 눈가의 미소, 이 작은 솜털 뿌리들의 맞닿음으로 너와 내가,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도록 존재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어야겠다. 그것은 물질화되어가는 현실에서 자연의 순리를 저버리지 않고 아름다운 시공간을 뿌리내리게 하는 근간이 되겠다. 바람과 태양과 공기들과 상생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치열하게 양분을 만드는 나무처럼,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욱 솜털 뿌리를 많이 내려서 거센 바람에도 아니 휘는 존재감으로 유유하는 나무들로 거듭나기를 소망해본다. 살 맛 나는 세상,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과의 맞닿음, 고맙고 기쁜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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