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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하 Mar 30. 2022

꽃, 섬세함의 미학

조지아 오키프의 꽃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나무도 보고 숲도 함께 보려 했다. 아니, 나무를 더 봤는지도 모른다. 전체를 보았다가 사소한 것, 세심한 것을 놓쳐 버리고 결국 그 사소함으로 일을 그르치거나 관계가 깨지고 다쳤다. 거기서 얻어지는 생채기는 시간이 흘러 망각되었겠지만 오늘처럼 하늘이 시퍼런 날엔 또다시 그 생채기가 덧나는 것 같다. 어쨌거나, 그런 까닭에 일이든, 사물이든, 관계이든 더 예민하게 들여다보는 내가 되었다면 억지일까?


사물을 볼 때 시선을 고정시켜 오래도록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땐 상념도, 정념도, 어디로 갔는지 그 모든 념(念)이 없었던 사람처럼 내가 그 사물이고, 그 사물이 내가 된 듯 그 순간을 언제 멈추어야 될지, 아니 멈출 필요가 없다는 듯이 뚫어져라, 또는 그윽하고 세심하게 바라본다. 예를 들면 꽃이 아니라 꽃잎 한 장을, 하늘과 맞닿는 아파트 지붕 끝자락이라든지, 베란다 난간에 매달린 빨래 한 장의 펄럭거림이라든지, 화초의 가녀린 이파리들 하나하나라든지, 그렇게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한 아름다움으로 각인되는 레이아웃이란, 얼마나 신선한 것인지!


여기,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미국)의 그림을 보자. 그녀는 꽃을 유난스럽게도 크게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실제의 사물을 작은 캔버스 안에 통째로 집어넣어 그리는 그림의 일반적인 통념을 벗어나 실제보다 대상을 크게, 아주 크게 그렸다. 그녀의 그림들은 자칫 남성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 성의 상징물로 표상되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드넓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얘기하기 위해 모든 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 세상의 광활함과 경이로움을 가장 잘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 라는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여성성이나 남성적인 시각엔 관심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탐미적인 시선과 화가로서의 자의식이 분명한 세계가 독특한 작품을 만들게 하였고 그것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름만으로 가부장적인 세상에서 여성성을 더 두드러지게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것은 생각지도 못한 느낌이며 사실이다.


오키프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내가 경험한 그 아득하고 신선했던 시각 하나와 데자뷔 되었다. 대상을 섬세하고 예리하게 바라볼수록 영원적이고 본질적이며 그래서 우주적인 견고함으로 확장된다는 사실이 그녀의 꽃 속에 다 들어있는 듯했다. 꽃봉오리 속은 생명 탄생의 근원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피어난 꽃은 이내 지고 만다는,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세계를 보는 것 같지만 다시 뒤집어서 말하면 한 알의 씨앗이 마침내 꽃으로 피어난다는 의미로 생명의 시작과 끝이 통한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신비의 세계다. 꽃 하나에서 우주가 그토록 작은 것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시공을 초월해 꿰뚫수 있다면 이것이 우주적 견고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냥 지나칠 수 있고 놓칠 수 있는 작은 것, 사소한 것,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들여다볼수록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주는 아주아주 특별한 선물처럼,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주고 있다.


오늘도 아주 작은 것들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을 가장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고, 가장 개인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엄숙한 진리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이고 싶은 거다. 탐미적인 섬세함으로 미학적인 일상을 누려 보자.






***** 다음 글은  <꽃, 섬세함의 미학>에 대한 수필평론가의 평론입니다.


오**의 글은 세속적인 작태를 벗어난 자기탐색의 색채가 짙다.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할 가닥을 잡은 것이다. 그것은 상처가 덧나는 것을 우려한 자기기재의 방어수단인지 그건 모른다. 먼저 자신부터 용인하자는 웅얼거림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삶도 그렇지만, 문학의 길도 달콤한 위안이 아니라 쓰디쓴 환멸로 얼룩질 때가 많다. 그런 현실을 녹여내지 못하는 것은 괴롭다. 허나 상 대를 탓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는 모습은 아름답다. 현실을 다루면서 현실 이면의 거짓이나 억지 위장을 내세우지 않는 솔직함에도 이끌린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비밀이지만, 난 살아날걸요.'  어쩌면 문학에 대한 포부를 그렇게 앙큼하게 감춰두었을 만도 하다.


그러나 삶조차 강렬하고 도발적인 자신의 작품과 닮았다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들을 조명하면서 작가의 시선이 예상 외로 소박하고 유순한 점은 아쉬웠다. 얼마 전 제이슨 드카에 테일러의 해저전시 작품〈조용한 진화를 매력적인 시로 승화시킨 한 시인의 심미적 묘사에 가슴 떨렸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인들이 꽃잎그림에 대해 여인의 에로틱한 상징으로 보인다고 말해도 가볍게 일축하고만 화가의 담백한 태도를 닮고 싶은 것인지, 샌타페이에 있는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장의 말처럼 '보는 것만으로 예술가 정신을 세례 받는 느낌을 받을 것' 이라는 신봉자의 역할을 자처한 건지, 그러나 한국적 정서에 충실한 작가의 단정한 글 솜씨를 무어라 할 수는 없다. 수필가의 양적 팽창으로 비슷한 주제의 글들이 범람하는 시점에서 자신을 궁구한 작가의 시도는 나름 의의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과 품을 들여서라도 또 다른 작품을 대하고픈 욕심도 생긴다. 항상 그렇지만 구원으로의 글쓰기 행위는 어느 정도의 인센티브(incentive)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나지막하나 힘 있는 언어가 좀 더 발전하여 전통과 두께에만 집착하는 문단의 매너리즘을 타파할 수 있기를, 그런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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