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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슬 Nov 01. 2020

생일 편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문학동네)」

   작년 이맘때쯤 우리는 노을을 보러 갔었지. 네 생일을 일주일하고 하루 앞둔 한글날이었어. 용산역에서 만나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 스키야키를 먹고 다섯 시가 되기 전에 동작대교로 향했어. 도착해 보니 전망카페 테라스는 이미 만석이 되기 직전이었지.

   난간 쪽에 겨우 자리를 잡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일몰을 기다렸어. 테라스에 앉아 강바람을 맞기에는 추운 날씨였는데 그래도 아직은 가을인지 생각보다 해가 길었어.

   그래서 뜬금없이 거기서 선물을 건넨 거야. 커피를 다 마셨는데도 아직 사방이 환해서.


   색연필과 오일파스텔.


   너는 알까, 사실 나는 그 선물이 부끄러웠다는 걸. 내가 정말로 주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거든. 하지만 그걸 들고 너를 만나러 갈 수밖에 없었어. 그건 내 최선이 겨우 이 정도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기도 했어.


   기억나?

   한동안 네가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었을 때. 그래서 우리 함께 만나던 친구들 모임에도 나오지 않으려고 했을 때. 그래도 오라고, 늦게라도 마음이 바뀌면 와서 같이 놀자고.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전달하면서 내가 했던 말.

   "오늘 회비는 3만원이야."

   그때 내 체크카드에는 6만원이 없었어. 그래서 네가 몇 달째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돈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나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기억나?

   엄마 수술 때문에 네가 며칠간 병원에 있었을 때. 보호자 역할을 하느라 지친 널 챙긴답시고 내가 뜬금없이 편의점 초코우유 기프티콘 하나 보냈던 거. 사실 처음에 골랐던 건 케이크였어. 그걸 보내면서 순자 씨의 수술이 무사히 끝난 걸 축하해 주고 싶었거든. 하지만 결제 직전에 결국 취소 버튼을 눌렀어. 케이크 하나 살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만 원짜리 몇 장에 인색해지는 내가 참 싫더라.


   어쩌면 너는 이미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기억하고 있더라도 중요한 건 마음이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그런 일들은 아무리 쓸어내도 어디선가 계속 나오는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내 마음에 아주 오래오래 남아서 자꾸만 나를 아프게 해.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 년 좀 안 되어서 우리는 구십만원에 피아노를 팔았다. 내야 할 집 월세가 없어서였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돈에 대해 생각한다. 돈을 어떻게 벌고 쓰는지가 아니라 그냥 돈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그냥 어떤 사람에 대해 생각하듯이…… ㅡ(p.97)     


   우리의 카카오톡 대화창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돈 얘기지. 우리는 항상 돈이 없고, 그래서 틈만 나면 돈에 대해 얘기해. 각자의 가난이 어떤 모양인지, 그게 우리를 어떤 식으로 비틀어 놓았는지에 대해.

   너는 로또를 열심히 사잖아. 만약 1등에 당첨된다면 당첨금을 어디에 어떻게 쓸 건지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곤 하지.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도 속으로 생각해. 그렇게 큰돈을 손에 쥐게 된다면 내가 하고 싶은 건 딱 하나야.

   돈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것. 내가 돈을 통해 가장 얻고 싶은 건 바로 그거야.


   저녁을 먹긴 해야 하는데 집 냉장고에 별게 없어서 마트에 갔다. 음식을 잘 할 줄 몰라서 순두부와 순두부찌개 양념을 샀다. 둘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것 같았다. 파를 썰고 있는데 류서가 말했다.

   이모, 이모는 가난하지?

   아니?

   엄마가 이모는 가난하댔어.

   아니라니까?

   그래서 책도 많이 읽지 말랬어.

   그래, 니 마음대로 해.     

   언니를 이해하기 위해 가만히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ㅡ(p.102~103)


   이슬아, 우리는 책을 많이 읽어서 가난해진 걸까?

   그렇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내가 가진 책들을 몽땅 내다 버릴 수 있어. 정말 그렇다면, 우리의 가난이 책 때문이라면. 텅 빈 책꽂이를 비석처럼 세워 놓고 평생 책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알아.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아주 많다는 걸. 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것들을 하나씩 포기하게 된다는 것도 알아. 돈은 그런 식으로 소중한 것들보다 조금 더 소중해지고, 가장 중요한 것보다 조금 더 중요해지지.


   그날, 동작대교 전망카페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가 생각했던 노을을 보지 못했어. 꼬박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잠시도 한눈팔지 않고 집중했는데도.

   하늘은 푸르다가, 회색빛으로 점점 흐려지다가, 그냥 그렇게 그대로 깜깜해졌어. 뭐야, 이게 끝이야? 아름다운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을 기대했던 우리는 맥이 풀린 채로 다시 용산으로 돌아와 빵을 먹고 헤어졌지.


   그날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어.


   노을 없이 지는 해는 가난해 보였다.

   가난한 풍경을 바라보는 가난한 우리가 조금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다시 10월에 도착했어. 우리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그때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것 같아. 나는 아주 오랫동안 돈이 미웠거든. 나의 가난이 서럽고 부끄럽고 억울했거든. 하지만 이제 그런 마음을 버리려고 해. 달콤하고 안락한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반듯한 마음으로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고 싶어. 내가 가진 작은 돈을 미워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그걸 잘 지키고 키우는 방법도 차근차근 배우고 싶어.


   나는 그때 류서에게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았을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모는 벌써 서른이 넘어 있었어. 이모는 향수나 버터 같은 걸 마음대로 살 수는 없지만 잠을 잘 수 있는 방세와 각종 공과금, 그리고 교통비와 통신비까지 스스로 내고 살아. 아무 때나 와서 쉬다 가는 네 할머니 집 월세도, 병원비도 다 내 차지란다. 너 어디 커서 나만큼 사나보자. ㅡ(p.113~114)


   너의 서른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아주 작은 돈을 보내. 이 돈으로 향수는 살 수 없겠지만 버터 정도는 살 수 있기를. 저건 도대체 뭘로 만들었길래 저렇게 비싸냐고 우리 매번 놀라는 마담로익 크림치즈도 먹어 보기를.

 

   그리고 언젠가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기억나?

   그래도 우리 그 시절을 무사히 지나 여기까지 왔어.     

 

   다시 동작대교 전망카페에 앉아 그런 말을 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 그때는 분명 아주 근사한 노을을 구경할 수 있을 거야.


   생일 축하해.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우리 꼭 부자 할머니가 되자.




   (하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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