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이현호(문학동네)」
처음 사주를 본 건 아마도 스무 살, 가을이었을 거야.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인데. 빨간 펜으로도 이름을 잘 쓰는데. 그러니까 잘 기억나진 않지만, 친구를 따라갔을 거야. 분명 사주를 보러 간 건데 점을 보려면 음료를 주문해야 하는 이상한 곳에서 뚱한 표정으로 별수 없이 “김이슬(金이슬)이요. 91년 10월 17일, 새벽 6시 15분이요.” 이렇게 말했을 거야.
그러고서 나는 대뜸 혼부터 난 거지.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어! 잠깐 살다 가고 싶어?”
역술가는 대뜸 그랬어. 이름이 구리다고. 뜻도 없는데 뭘 바라냐고. 아침이슬처럼 잠깐 살다 가고 싶은 거냐고.
그 이후로도 좋은 말은 못 들었어. 일찍 결혼하면 이혼 수가 있다느니 사주에 자식이 없다느니. 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냥 별 볼 일 없는 사주라고. 대신 이름을 바꾸면 좋아질 수 있다고 작명비는 단돈 삼십만 원.
그 철학관을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어. 절대 이름 따위 바꾸지 않겠다고. 내가 빨간 펜으로도 이름을 곧잘 적는 건 미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쩌면 너무 미신을 믿어서인지도 모르겠다고.
사주 같은 걸 믿는 사람은 기대가 남은 사람일까, 기대가 없는 사람일까. 희망하는 사람일까, 희망하지 않는 사람일까. 겁먹은 사람일까, 잃을 게 없는 사람일까. 알고 싶은 사람일까, 모른 척하고 싶은 사람일까. 준비하는 사람일까, 맨몸인 사람일까. 방어하는 사람일까, 체념하는 사람일까. 기다리는 사람일까, 버리려는 사람일까.
다정아. 너는 팔자를 믿어?
너도 어쩔 수 없음 같은 걸 믿어?
여러 마음들이 등장하는 이현호 시인의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라는 시집에는 「빈방 있습니까」라는 시가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얼룩은 썩 괜찮은 장래희망입니다
곰팡이에겐 감각기관이 없겠지요 아플 줄 모르겠지요
감각할 줄 모르는 자들이 소유를 합니다
시간을 지낼수록 검버섯같이 더욱 짙어지겠습니다
(…)
무늬와 얼룩의 계급 차이는 얼마만 한지
흐리다 옅다 번지다 같은 일도 나의 이력이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때 그 역술가는 이슬이 이슬이기에 행할 수 있는 일들을 몰랐던 것 같아.
이슬은 바람이 불고 구름이 많은 밤보다는 바람이 없고 맑은 밤에 더 잘 맺힌대. 그리고 이슬은 높이 있는 잎사귀보다는 지면에 가까운 풀잎일수록 더 잘 맺힌대. 그런 이슬은 강우량이 적은 시기에 식물에 수분을 공급하는 소중한 원천이 된대. 그렇대.
무늬와 얼룩의 계급 차이는 이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식의 차이 아닐까. 무늬는 찢어야 하고, 얼룩은 흐리게 옅게 번지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슬은 무늬보다는 얼룩에 가깝지 않을까. 이슬은 내일 밤에도 피는데. 그것이 이슬의 자랑스러운 이력인데.
요즘 내가 꽂힌 건 타로카드야. 직접 점괘를 보러 가지 않아도 동영상 속 혼자들이 다수를 위한 점괘를 봐 줘. 그들이 카드를 섞고 추려서 어두운 벨벳 천이 깔린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으면 나는 잠시 화면을 정지하고 왠지 끌리는 카드를 선택해. 그리고 그 카드의 타임라인으로 가서 내가 선택한 카드의 해석을 듣지.
동영상 속 혼자들은 대부분 좋은 말만 해 줘. 애초에 그런 주제들로만 점괘를 보는 거 같기도 해. 뭐, 가을에 생길 좋은 일이나 조만간 나에게 다가올 운명적 변화 같은 거. 꼭 그런 게 아니래도 미지근한 말을 따뜻한 말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그들에겐 있는 것 같아. 이런 식이야.
“당분간 힘든 시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이나 조력자를 뜻하는 카드가 나온 것으로 보아 여러분을 구해 줄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시집에서 이현호 시인은 번번이 의문을 희망으로 착각한다고 말해. 그러면 나는 이제 위에서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어.
빨간 펜으로도 이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희망에 대한 기대가 남은 사람이야. 그래서 겁을 먹은 사람이고 되도록 잘 알아서 무엇이든 방어할 준비를 하고 싶은 사람이야. 그렇기에 누구보다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야. 절대로 내일을 버리기 싫은 사람이야.
내가 두 번째로 사주를 본 건 아주 최근인데 이번엔 이런 말을 들었어.
“끝으로 갈수록 운이 상승하는 사주예요. 말년에는 돈도 많아요.”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을 수 없으면서도 끝으로 갈수록 운이 상승하는 사주는 얼마나 고달픈 사주인 거냐고 생각했어. 말년의 사전적 의미가 ‘일생의 마지막 무렵’이란 걸 생각하면 더 그랬어.
그래서 언제부터 운이 핀다는 건지, 말년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이런 건 아무래도 알 수 없어서 나는 그냥 나의 자랑스러운 이력만을 생각하기로 해.
내일은 있을 것이고 내일의 나 역시 있을 거라는 믿음만을 지키기로. 오직 나만이 나의 어쩔 수 없음이기를.
살아남자는 살아서 남자는 건지 남았으니 살자는 건지
상관없었다,
(…)
아름다운 사람에게 나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ㅡ 북극점에 서서 북쪽이 어디냐고 묻는 건가요, 북극점보다
더 북쪽은 없고 나보다 더 나는 없어요
(…)
ㅡ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다음 대사를 고민하며
걸어나갔다 나의 보폭으로
이슬은 순자씨가 지어 준 이름이야.
당시 순자는 너무 골치가 아팠대. 대개 그렇듯이 한자로 이름을 지으려니 이름에 써도 되는 한자가 있고 쓰면 안 되는 한자가 있고, 같이 쓰면 좋은 한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한자가 있고. 애초에 한자 이름이 아니면 해결될 문제여서 그때 한창 유행하기 시작한 한글 이름을 생각했대. 그렇게 지은 이름이 이슬.
이슬.
덕분에 나는 이름의 뜻대로가 아닌 나, 이슬의 뜻대로 나아갈 수 있어.
(이슬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