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잡이, 아주 작은 기도

by 이손끝


나도 언젠가 돌잡이를 했더란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은 없지만, 아빠는 내가 ‘실’을 잡았다고 했다. 오래오래 살 거라고, 장수하겠다고 어른들이 말씀했단다. 아이가 태어나고 첫 생일에 하는 의식. 손에 쥔 물건 하나로 아이의 앞날을 점쳐보는 일이 얼마나 정확할지는 몰라도, 우리는 여전히 돌잡이를 한다. 예쁜 상 위에 작은 상징들을 놓고, 아기가 잡은 한 물건을 두고 ‘이 아이는 이런 삶을 살겠구나’ 막연한 미래를 들여다보려 애쓴다. 누군가는 그걸 점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단지 놀이일 뿐이라 하지만, 엄마가 되어 다시 그 장면 앞에 서보니 그건 점도 놀이도 아닌, 아주 작은 기도였다.


우리 첫째 아이는 마이크와 돈을 함께 잡았다. 아이는 말이 빨랐다. 돌도 되기 전부터 옹알이 속에 정확한 단어들이 섞여 나왔고, 또렷하게 의사를 표현하곤 했다. 마이크를 잡은 날, 누군가는 “연예인 되겠네”라고 말했고, 또 어떤 어른은 “리더가 되겠네”라며 웃었다. 돈까지 잡았으니 말 잘해서 부자 되겠다고들 했다. 그 말들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만큼 자기표현이 강했고, 상황을 파악하는 감도 빠르며, 낯선 사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 다정하고 영리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나는 가끔 아이를 바라보며 속엣말을 한다. '너의 목소리, 세상에 좋은 말들로 채워주기를.'


둘째는 조금 달랐다. 돌잡이 상 앞에 앉은 둘째 아이는 한동안 아무것도 잡지 않고 가만히 물끄러미 상 위만 바라봤다. 가족들이 환하게 웃으며 응원하자 마침내 조심스럽게 실을 잡았다. 나는 순간 놀랐다. 나와 같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둘째도 실이구나’ 싶어 속으로 웃었다. 그런데 그 작은 손이 실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에 툭 던져버렸다. 모두가 놀라서 웃었고, 아이는 천천히 손을 뻗어 이번엔 ‘붓’을 잡았다. 묘하게 복잡한 마음이 일었다. 실은 던지고, 붓은 붙잡는 아이. 그것이 왠지 어떤 선언처럼 느껴졌다. ‘나는 길게 사는 것보다 뭔가를 남기고 싶어’라는 말처럼.


그날 나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나 역시 실을 잡았던 사람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붓을 던진 사람이었다. 열망은 있지만 기술은 없고, 문장을 사랑하지만 제대로 쥐지 못한 채 미끄러뜨리는 사람. 그런 나와는 다르게, 둘째 아이는 실을 던지고 붓을 움켜쥐었다. 이 아이는 말보다 손이 빠를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그리는 게 먼저일지도. 생의 한복판에 서면, 이 아이는 나처럼 한밤에 쓰지 못한 문장으로 괴로워하지 않고, 캔버스를 펼치고 붓을 들어 마음을 꺼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왠지 이 아이는 자기를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 같아 부럽고 또 대견했다.


나는 실을 잡은 사람으로서 자주 혼란스러웠다. 다른 것은 재능인데 실은 그저 오래 사는 것 아닌가, 하고.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남기고 싶은 말을 남기며 세상을 이롭게 하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아이들이 잡은 물건을 보며 나는 거꾸로 내 과거를 되짚었다. 실을 잡은 나는 왜 자꾸 붓을 흘리는지, 글을 붙잡으려 하면 왜 손끝이 부르르 떨리는지, 마이크를 잡으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도 왜 자꾸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자꾸 치고 올라오는지, 그리고 그 욕망이 왜 나를 괴롭히는지.


돌잡이는 아이의 미래를 보는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내 과거를 되짚는 시간이기도 했다. 실, 마이크, 붓. 이 세 가지는 마치 우리 세 식구의 또 다른 자화상 같았다. 오래오래 살아남고 싶었던 엄마, 말로 세상과 잘 연결되는 첫째, 손끝으로 뭔가를 그려가고 싶은 둘째. 아이들의 작은 손이 한 물건을 택하는 그 순간, 나는 기도했다. 잡은 대로만 살지 않아도 좋다고. 손에 쥐었던 것을 나중에 놓아도, 다른 걸 붙잡아도 괜찮다고. 선택의 순간은 하나지만, 인생은 열 번, 백 번 다시 선택하는 일이라고. 너희는 살아가면서 실도, 붓도, 마이크도, 돈도, 책도, 하다못해 숟가락도, 손전등도 붙잡을 거라고. 세상은 너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질 테니까. 하지만 단 하나, 어떤 것을 붙잡더라도, 그 안에서 너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너희 손이 작지만, 그 안에 있는 세계는 크다는 걸 잊지 않기를.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조용히 말했다. 실을 잡은 나, 아직 늦지 않았다. 내 손에도 붓을 다시 쥘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 남기고 싶은 문장이 있다면, 그걸 써내는 데 필요한 시간은 아마도 네가 살아온 날들 속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다시 세상에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며, 나도 내 안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꺼내어본다. 오래 살아남은 사람만이, 결국 이야기를 남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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