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셈하고, 내 발길로 움직일 수 없는 것.

운수

by 이손끝

운수(運數). ‘운(運)’은 움직이고 흘러가는 것, ‘수(數)’는 셈할 수 없는 흐름과 숫자. 결국 운수란, 셀 수 없는 우연의 흐름이 내 삶에 잠시 머무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운이 좋다, 나쁘다”라고 쉽게 말한다. 마치 손에 잡히는 실체라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운수는 늘 흘러가고 있다. 물처럼, 바람처럼, 내 마음이 따라가든 거슬러가든 상관없이.


오늘은 사무실이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상담 전화도 없고, 메일함도 텅 비어 있었다.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불안이 뱀처럼 기어 올라왔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이 자꾸만 휘청거렸다. 매출이 떨어진 수치를 확인하는 순간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도 바빠야 내 존재가 유효한 것 같은데, 고요는 늘 나를 초라하게 한다.


사실 나는 사고가 잇따라 터지고 일이 꼬일 때보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는 날이 더 괴롭다. 사고는 그래도 해결하면 된다. 그 해결 과정에서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단 확신이 생긴다. 그런데 고요는, 도무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빈칸 같아. 가끔은 차라리 누가 혼을 내주길 바라기도 한다. 불운을 핑계 삼아 넘어가면 되니까. 예전에도 일이 꼬이고, 불운한 하루라 여길 때면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잠들어버리곤 했다. 잠으로 하루를 잘라내고 나면, 다음 날은 좀 괜찮았다.


그런데 오늘은 사고도 불운도 없는데, 너무 고요해서 몸서리쳤다. 불안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오늘의 운세를 열어봤다. 운세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박장대소. 막힌 것이 뚫리고 해결되는 날.” 순간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뭐가 뚫린단 말인가. 매출 그래프는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상담 전화는 단 한 통도 오지 않았는데. 허탈해서 정말 박장대소할 지경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지금 해결되고 있는 건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흘러가는 운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결국 운수는 내 계산표로만 잴 수 있는 게 아니다. 수(數)는 내 손으로 셈할 수 없는 것. 운(運)은 내 발길로 움직일 수 없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운명’이라고도, ‘팔자’라고도 불렀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걸 배웠다. 나는 여전히 불안했고, 매출 수치 앞에서 약했으며, 고요를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알았다. 이런 허탈한 순간에도 내가 웃을 수 있음을. 불안과 무기력, 우울이 몰려와도 그것을 붙잡아두지 않고 그냥 지나가도록 둘 수 있음을.


운수는 결국 ‘박장대소’였다. 나 자신이, 이 고요 속에서 박장대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만큼 우스꽝스러운 존재란 걸 깨닫는 하루. 그러니 나는 웃는다. 기계처럼 글을 쓰던 나, 숫자에 흔들리던 나, 아무 일 없는 하루를 견디지 못하던 나. 다 합쳐도 결국 흘러가는 물살 위에 놓인 조각배일 뿐이다.


내일은 또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전화를 걸어올 테고, 누군가는 주문을 넣을 테고, 내가 벌여놓았던 일에 성과가 비칠 테니까. 오늘 고요했던 자리가 사실은 다가올 무언가를 위한 숨 고르기였다고 믿는다. 운수란 결국,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


KakaoTalk_20250820_161038199.jpg 오늘의 운수


이 글은 단어의 온도 매거진에 발행 중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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