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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llalawoman Dec 23. 2021

식어버린 커피 한잔

식구들이 각자의 사회의 현장으로 떠난 후,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진다.

물론, 해도 해도 티 나지 않는 집안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전시 전에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커피 한 잔을 준비한다.


준비된 커피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식탁 의자에 앉으려는 찰나

세탁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에 다시 자리를 일어나 서둘러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빨래를 넌다.

식탁으로 가는 길에 햇살에 지친 화분들을 옮겨놓고, 식구들의 흔적이 남은 탁자 위, 소파 위도 정리하고

먼지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니 걸레를 들고 다시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커피 잔이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커피 잔에 온기는 이미 차갑게 변해버렸다.

처음 호기롭게 여유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은 시들어 버렸다.


'또 식어버렸네.....'

차갑게 식은 커피 맛은 어찌나 쓴지 결국 싱크대 하수구에 흘려버린다.


여유를 즐기겠다는 의지와 눈에 보이는 집안일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신체와의 괴리 속에서

나의 커피는 늘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가족과 온종일 함께였던 지난해 코로나 봉쇄 기간이 떠올랐다.

남편 재택근무와 아이의 온라인 수업 일정에 맞춰 쫓기듯 식사 준비를 하고,

설거니, 빨래, 청소 등 반복되는 집안 일로 혼돈의 시간 속에서 정신을 잃는 것 같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은 바람과 쫓기는 마음이 충돌해 커피를 내려놓고, 또 집안일에 정신을 빼앗기다가

'아차' 싶어 돌아오면 싸늘하게 식은 커피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식은 커피라도 이건 커피다'

그랬던 마음이, 어느 순간 손목이 아리고 마음도 지친 시간까지 흘렀다.


긴 봉쇄 기간으로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에 요일과 시간은 의미를 잃어간 어느 날이었다.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커피 한 잔이 꼭 내 모습 같았다.

온도와 향을 잃은 처량한 커피 한 잔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또 식었네... 진짜 지겨워 이젠!'

눈물이 쏟아졌다. 식은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꾹꾹 참던 설움이 터져버렸다.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없는 인생이라니! 말도 안돼.'

'이 시간이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집 안에서 갇혀있다 이대로 인생이 끝나면 어쩌지?'하는 걱정에 허우적거렸다.


다행히도, 시간은 흐르고 아직 코로나와 함께 생존중이지만 식구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다르지 않은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식어버린 커피를 바라보며, 처량하거나 서럽지 않다.

'아이고, 또 식어버렸네....' 하는 일은 빈번하지만,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같지 않다.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간 지금은 내 마음만 잘 붙잡으면, 언제든지 따뜻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꼭 누리리라'하는 결의를 지켜내고 있다.

식은 커피를 마주하게 되면 다시 내리면 된다.

조금 더 진하게 내려서 더 진한 향기를 누리면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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