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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y 25. 2022

반려동물 문화에 대한 오해와 이해

ep.7 고양이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


어렸을 때 옆집 마루에 고양이가 뻘건 쥐를 놓고 간 일이 있었다. 그 일은 동네에 큰 화제가 되었다. 그것이 뭔가 이유가 있는 고양이의 피맺힌 복수인 줄로만 알았고, 너무 놀란 그 집 사람들은 길고양이가 지나갈 때마다 쫓아내곤 했다. 고양이의 습성을 알고 보니 그건 귀중한 사냥감을 잘 손질해서 가져다준 선물일지도 몰랐다. 만약 그랬던 거라면 고양이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고양이를 영물이나 도둑이라고 인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에게 지배되지 않는 특성이 그 인식에 배어 있지 않을까? 성서에서 위험하고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죽임을 당한 카인에 대해 데미안에서는 ‘두려움 없는 자’의 운명으로 해석한 것처럼 고양이도 사람에게 지배되지 않아서 영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반려동물이 된 역사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소와 돼지, 닭, 개처럼 다른 동물들은 대부분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길들여지고 가축화되었다. 그 필요의 전면에는 노동력이 있고 이면에는 죽음 이후, 아니 잔인하게도 탄생 이전부터 인간을 위해 죽을 운명을 가지고 길러지기도 한다. 반면 고양이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래서지 집고양이로 함께 한 문화도 오래되지 않았다.


《캣 센스》에서는 고양이가 인간에게 유익했던 한 가지와 반려동물이 되는 여정에서 방해가 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전자는 쥐를 잡는 것이고, 후자는 육식 동물이라는 것과 이집트 종교와 결부된 이교도 이미지였다. 고양이에게 신선한 육식 먹이를 공급하기 어려웠고, 고대 이집트 무덤에서 함께 매장된 고양이가 발견된 탓이었다. 그러다 항해가 시작되면서 쥐를 잡을 필요에 의해 고양이가 다시 인간 가까이에 자리잡게 되었다.



중세 이전 그리스와 프랑스 등지에서는 악귀를 쫓는다는 명분으로 고양이를 희생시키기도 했다. 역사는 특히 검은 고양이에게 가혹했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종교 집단이 마녀라는 누명을 씌 여성들에게 그러했듯 고양이를 박해하는 시기가 있었고,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는 쥐와 함께 많은 고양이가 죽었다. 이렇게 역사 속 고양이들은 알게 모르게 인간과 운명을 함께 해왔다.




고양이와 함께 살기 전에는 반려동물을 아기띠나 유아차에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유난하게 보였다. 그건 내 생각이라기보다는 혀를 끌끌 차며 말세를 외치던 어른들의 영향이 컸다. 고양이를 키우고 동물병원에 다니고 나서야 그들을 절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평생 인간만을 바라보고 기쁨이 되어 주었던, 나이 들고 몸이 아픈 반려동물들을 위한 극진한 보살핌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는 타자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간섭과 비난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자식처럼 돌보는 일이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 시대를 살아온 분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르겠으나, 시대가 변화하는 만큼 인식의 변화도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가끔 동물이 싫다던 부모님이 요상한 자세로 동물 사진을 찍고 있는 짤(사진)을 보면 웃음과 안도가 번진다.




나도 회사에서 동물 혐오의 말들을 들었다. 대부분은 호기심과 약간의 부러움으로 먼저 고양이에 대해 물어오는데, 어느 한 직원은 농담이랍시고 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 그거, 털 날리고 구찮은데 털을 다 뽑아버려야지 그거.” 놀랍게도 어르신도 아니고 나보다 나이가 어린 후배의 말이었다. 악의는 없지만 농담이 늘 지나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음에도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은 다른 동료분이 산책을 싫어하는 강아지와 사는데, 동물병원에서 발톱을 보고 산책을 일부러 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일화를 얘기하는 중이었다. 그 대목에서 어떤 분은 대뜸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되면, 키우지 말고 드세요.”라는 말을 한 것이다. 당사자는 차마 어떤 말도 하지 못했고,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망언 좀 그만하시라고, 망언집을 만들어야 될 정도라고 비꼬며 따졌는데 그는 그게 왜 망언인지 모르겠다는 듯 싱글거리기만 했다. 이들은 농담이 아니라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오래전부터 반려동물과 함께 했던 분들은 수많은 편견들에 부딪쳐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마다 생각과 경험은 다 다르다. 짖거나 냄새가 나거나 하는 직접적인 피해는 당연히 조심하고 미안해야 할 일이지만, 혐오까지 받아야 할까. 내가 겪은 사회 인식이 이럴수록 반려동물들을 더 지켜주고 싶다.


나도 출근길에 만나는 고양이에게 밥을 몇 번 준 적이 있다. 한 할머님께서 그 집 앞이 아닌 공원임에도 싫은 내색을 하시며 핀잔을 줬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다 "제가 치우겠습니다" 했는데 어느새 나타나신 캣맘께서 "할머니, 같이 먹고 살아야지요"라고 말씀해주셔서 큰 힘이 되었다. 그 분은 그런 일을 수없이 겪었을 텐데. 지인의 지인인 캣맘 귀에 대고 ‘자꾸 밥 주면 너 내 손에 죽어’라고 속삭인 어떤 사람들, 그런 실질적인 위협에도 거리의 동물들을 놓지 않는 분들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역사를 타고 내 에 내재된 집단 무의식 때문일까, 고양이와 함께 살고부터 나는 밤에 무서운 것이 없어졌다. 옆에서 자는 가족이 있어도 악몽을 꾸고 몸서리치는 날이 있었고, 불면으로 힘들었던 날도 많았다. 곤히 잠든 가족을 깨우기는 미안하지만 고양이를 깨우는 건 덜 미안했다. 그래서 무섭거나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쿠키를 꼭 끌어안고 안정을 얻었다. 너그러운 우리 고양이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나를 달래주곤 다.




Cover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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