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입원하면 맛있는 걸 먹어요.
매운 닭볶음탕이 나왔다. 이른 아침 식사 메뉴로. 주부로서 삼시 세끼 메뉴 고민이 매우 힘들다는 건 알지만 이번엔 영양사 선생님이 조금 잘못 생각하셨다. 파 조각을 입에 넣었더니 매운맛에 혀가 얼얼했다. 실수로 캅사이신을 넣으셨나? 본능적으로 이 메뉴는 먹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뚜껑을 덮었다. 그날 아침은 소금을 잊은 계란찜과 김치를 먹었다. 밤새 좁은 병상에서 링거줄과 아이와 시름하고 가까스로 눈을 뜬 시각, 햇살이 병실 깊숙한 곳까지 닿아 남은 잠을 깨웠다.
깔깔한 입안에서 부서지는 계란찜은 시럽 빠진 푸딩 같다. 그래도 먹어야지 안 그러면 볼썽사나운 일이 생긴다. 큰 아이가 아주 어릴 적, 폐렴에 걸려 입원했을 때 밤잠을 설치고 끼니를 거르며 간호하다가 나도 뻗었다.
“엄마, 폐렴이야. 이거 너무 심각하네. 당장 입원해야 하는데!”
아이가 입원한 병원에서 진료를 본 나는 아이 옆에 누워 같이 링거를 맞았다. 그리고 아이가 퇴원한 날 밤 응급실로 향했다.
그 뒤로 나는 아이가 아프면 잘 먹기로 결심하며 세끼 보호자식을 신청했다. 엄마로서 의무를 잘 해내기 위해서 끼니는 매우 중요하니까. 맛없는 병원 밥 씩씩하게 먹는 내가 어떨 땐 자랑스러울 정도다. 어른이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엄마가 되어 가고 있다고 나는 나만의 신화를 몰래 써내려 가고 있었다.
한편 저녁 식사시간이 되면 병원 근처엔 많은 오토바이가 오고 간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매콤 달콤한 떡볶이, 달달 볶인 춘장 덮은 자장면, 오향 냄새 가득 머금은 족발 냄새가 그윽하게 차오른다. 그중 단골 메뉴는 지글지글 끓는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낸 황금색 치킨. 보호자들은 볼록한 배를 두드리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다.
‘아니, 애가 아픈데 지금 치킨이 넘어간다고? 엄마 아빠 자격이 있는 건가?’
나는 보호자들의 식욕에 개탄했다. 그날도 먹기 싫은 병원 밥을 꾸역꾸역 삼킨 여러 날 중 하루였다.
퇴근하고 늦게 병원에 들른 남편에게 내가 목격한 보호자 야식 문화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애가 아픈데 치킨을 먹는다는 둥, 그 사람 어제는 짬뽕을 먹었다는 둥, 병원비보다 야식비가 더 많이 나오겠다는 둥 하면서. 가만히 듣던 남편이 내게 이야기했다.
“여보도 밥이 맛없어서 곤욕스럽다며. 맛있는 거 사 먹으면서 병원에 있어요. 간호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먹고 싶은 거라도 먹어야 덜 힘들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온몸과 마음으로 간호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처럼 자기 자신을 버릴 필요는 없다. 아이가 아프니까 속상해서 당연히 밥도 잘 못 먹어야 하고, 잠도 잘 못 자야 한다고. 마음이 편치 않으니 웃지도 말아야 한다는 단정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니다.
너무 많은 희생은 보상을 요구하는 억울한 감정을 불러온다. 나는 병원에 있는 동안 언제나 아이가 잠들면 핸드폰으로 온갖 쇼핑몰을 휘젓고 다녔다. 터져 나가는 옷장 앞에서 이제는 소비를 줄이자고 다짐했지만 조절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내가 이렇게 조절을 못하는 사람이었나?’
소비는 비단 옷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화장품, 살림살이, 책까지. 그래서 우리 집은 언제나 물류창고다.
단정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은 마음과 달리 멈출 수 없는 구매욕을 조절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속상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유를 찾았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내 삶의 특수성과 어머니 희생에 대한 편향이 보상 심리를 항상 자극하고 있었다.
‘아이고, 내 같으면 절대로 못 모시고 산다. 니는 속도 없나?’
신혼 초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엄마에게 들은 말도 한몫했겠지.
세상이 만들어 둔 이상적인 모성 원형은 늘 엄마들을 괴롭힌다. 초보 엄마 시절, 쇼핑몰에 들어서자 출입 문턱에서 자지러진 큰 아이를 어르고 있을 때였다.
“애미 자격도 없는 년이 애를 낳아가지고 시끄럽게, 씨발.”
밖으로 나가며 분노를 내뱉은 그 사람 한 마디에 친구는 폭발했고 나는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내 품에서 발악하는 아들이 미웠다.
모성애는 본디 본능이 아니라 인지에 의해 만들어진다. 루시 쿡이 쓴 『암컷들』 에는 모성발현 기제가 모성애 원형과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했다.
“뒬락은 두 종류의 뉴런을 발견했다. 하나는 새끼 돌보기 행동을 하게 하는 갈라닌 뉴런이고, 다른 하나는 영아 살해 충동을 일으키는 우로코르틴 뉴런이다. 두 뉴런은 서로에게 직접 작용하여 하나를 자극하면 다른 하나가 억제된다. 따라서 두 행동은 상호배타적이다. 새끼를 돌보면서 새끼를 죽이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신경 회로는 암수의 뇌에 똑같이 배선되었다.”
루시 쿡 『암컷들』p220 ~p221
우리 뇌는 신경 가소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경 가소성이란 그 일과 관련된 신경 세포가 계속 늘어나는 현상을 뜻한다. 수초처럼 많아진 뉴런 간 간격이 촘촘해지면 신경 전달 속도가 높아지고 우리는 어떤 일에 익숙해진다. 아이를 돌보는 일도 그처럼 갈라닌 뉴런이 점점 발달하며 익숙한 일이 되어간다. 책에 따르면 갈라닌 뉴런에 자극이 가해지면 수컷도 새끼를 살뜰하게 돌보게 되고 우로코르틴이 자극되면 암컷도 새끼를 죽인다.
두 뉴런 중 하나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어 돌봄이나 영아살해라는 행동이 발현되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극단적인 본능이 서로 길항 작용하며 초보 엄마들을 힘들게 하는 건 확실하다. 너무 많은 사랑은 독이 될 테니 사랑과 비정을 섞어 적절한 마음의 온도로 아이를 키우라는 자연의 섭리가 엄마 아빠 모두에게 새겨져 있는 셈. 하나씩 밝혀지는 모성의 비밀은 신격화되어있는 어머니의 원형을 다시 만들고 아버지의 역할을 재정립하게 될 것이다.
남편이 가고 컴컴한 병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으니 십이 년 전 내게 욕을 하며 지나가던 어린 여자가 떠올랐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종종 생각나던 그 여자의 혐오. 이젠 그 사람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길에서 우는 아기에게 분노를 드러내며 살고 있을까? 어쨌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도 그 여자와 똑같다. 아픈 아이를 두고 맛있는 걸 먹는다고 엄마들을 흉봤으니까. 나도 모성신화라는 편향에 젖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보호자 야식 문화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잘 돌보며 건강하게 버틸 줄 아는 엄마들이 만든 훌륭한 문화다. 나는 편향을 걷어내고 다시 결론을 내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보호자식이요~”
이른 아침 나를 깨우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다. 아이를 깨우며 상태를 살피고 식판을 가져온다. 오늘은 무슨 반찬이 나왔을까? 뚜껑을 열기 전엔 설렘이 한가득. 어쩜 나는 보호자식을 기다리며 즐거운 지 모른다. 급식이 맛없다고 툴툴 대면서 메뉴를 기대하며 학교로 향하는 우리 아이들처럼.
“잘 먹겠습니다!”
아이와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시작한다. 매일 아침 나오는 계란찜엔 여전히 소금이 안 들어간 듯. 설렘은 금새 실망으로 바뀌지만 병원 1층엔 빵집이 있으니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