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가는 가을을 보내며
팔월 한낮의 볕이 남긴 열기는 밤에도 유난했다. 외기 온도계는 어둠 속에서 늘 28도를 가리켰다. 기후 위기, 지구 열대화라는 말을 실감하면서도 에어컨을 쉬 끄지 못했다. 냉방 휴지기를 잠시 가지면 치솟는 실내 온도에 가족이 기진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나 하나의 작은 실천이 분명한 보탬이 된다는 믿음으로 더위를 견뎠는데 올해 여름은 달랐다. 그럼에도 절기를 따라 계절은 돌아왔다. 따가운 볕과 청량한 바람이 혼재하는 시기. 열사병을 앓던 대기가 켜켜이 품은 습기를 말리면서 계절을 실감했다. 우리는 가을 문턱에 들어서 있다고.
이 계절에 들어서면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문안보다 앞서 여쭤보는 것이 있다. 바로 참깨 농사다. 항상 얻어먹는 아버지표 유기농 참깨는 어느 새 그해 기후 위기의 지표가 되었다. 기온과 환경에 예민해서 심어 가꾸기 까다로운 참깨. 아버지의 밭에서 참깨 수확량이 줄 때쯤 국산 참깨로 짠 참기름이 유기농 매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나마 입고되면 한 병이 고작이고 가격은 터무니없었다. 어느 날 생협 진열대엔 인도산 유기농 참깨를 가공한 참기름이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기후 위기로 참깨 수확량이 현저히 줄어들며 생긴 궁여지책이라고 했다. 참깨가 귀해지기 시작하면서 식탁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지역농산물과 유기농산물을 고집하던 나도 인도산 참기름을 쓰게 되었다.
찬바람 불자 참깨 안부를 묻는다. 부모님 농사가 성공적이면 예전처럼 참깨를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러나 올해도 글렀다. 엄마는 바닥에 떨어진 참깨까지 쓸어 담았지만 삼 킬로그램이 넘지 않는다고 전했다. 수고로움이 무색한 수확량에 참깨 농사는 이제 그만 지으시라고 했다. 그러나 내년엔 잘 될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엄마 마음이 애틋하다. 자식들 먹이겠다는 엄마의 지성에 감천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기후 위기는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었다.
얼마 전, 셋째 아주버님께서 추석 선물로 보내주신 사과는 강원도 홍천에서 달려왔다. 사계절 선선한 강원도에서 재배된 사과라니 아열대 기후가 되어가는 한반도를 실감한다. 어쩌면 지인들과 나눠 먹고도 남아 돌아 아낌없이 쏟아 먹던 참기름 사치를 더는 누릴 수 없을지 모른다.
이 와중에 절기는 계절을 불러와 위기를 무색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계절이 당연치 않다는 걸 안다. 아름다운 계절의 절멸을 막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창 너머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떨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가을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