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의 아침

다시 내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출근을 한다면 너무 이

by 이종화

아침이면 한 잔의 커피가 그립다. 본래 커피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난 그 한 잔에 하루의 소망을 담게 되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날엔 하루가 산뜻하길 기원하고, 동료들의 숨은 장점을 떠올리며 오늘은 탈 없는 하루가 되길, 잔업殘業 없는 기분 좋은 저녁이 되길, 한 모금의 커피를 넘기며 희망하는 것이다.

홀로 마시는 한 잔엔 여유가 듬뿍 배어 있지만, 함께 마시는 잔엔 부드러운 정情이 넘친다. 첫 출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의 멘토는 종종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곤 내게 이야기를 건네셨다. 황급한 일이 아침부터 산적한 날, 함께 일하는 차장님은 커피 한 잔 마시고 자료를 찾아보자 하셨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내 일은 커피 한 잔과 함께 참 부드럽게 넘어오기도 했다.

애연가愛煙家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으로 가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담배를 끊었다가 마누라 때문에 다시 피운다는 말부터, 새로 나온 저低타르 담배가 오히려 담배를 많이 피우게 만든다고도 하고, 야근이 없어지면 이걸 끊겠다는 공허한 다짐을 되풀이하기도 한다. 한 손엔 담배, 다른 한 손엔 커피를 든 이들은 자욱함이 주는 ‘5분의 행복’을 미지근해진 자판기 커피로 마무리한다.

국정감사로 회사에서 밤을 지새웠던 지난해 10월, 뜬눈에 몽롱한 정신으로 아침을 맞았다. 멍하니 모니터 앞에 앉아 아침 뉴스를 보고 있는데, 함께 일하는 동료가 불쑥 커피 한 잔을 건넸다. 따뜻한 라떼였다. 방금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아이가 인편人便으로 내게 이 커피 한 잔을 보낸 것이었다. 입맛이 없어 반밖에 마시지 못했지만 난 그 정성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차마 버리지 못했다.

유럽에선 18세기부터 커피가 유행했다고 한다. 역사의 장이 제국주의로 접어들 무렵, 식민지로부터 조달된 커피란 음료는 하루 세 끼 맥주만 마셔대던 유럽인들에게 퍽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음악가 바흐는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까지 작곡하며 이들의 커피사랑을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200여 년 전 보급된 커피가 ‘새로움’이었다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커피는 다름 아닌 ‘여유’일 것이다.

커피 한 잔엔, 마시는 이의 감정이 스며 있기도 하고 그의 희원希願이 녹아 있기도 하다. 스타벅스의 슐츠H. Schultz는 한 잔 커피에 그의 ‘성공’을 담았고, 나폴레옹 1세는 아침마다 마셨던 카페 로열의 푸른 불꽃에 ‘환상’을 느꼈다. 악성樂聖베토벤에겐 예순 알의 원두로 끓인 커피가 아침식사의 전부였고,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 역시 새벽 서너 시쯤이면 어김없이 커피를 타 마시며 ‘영감’을 얻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클린턴에게 백악관을 물려준 부시G. Bush는 자택으로 돌아온 날 아침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자신의 달라진 처지를 실감했다고 하고, 슬픈 일이긴 해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즐겼다던 고종황제는 아마도 힘없는 제왕의 ‘설움’을 마셨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열여덟 잔의 커피 속에 ‘사랑’을 키웠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한결과 은찬이 그러했듯 연인들에게 커피란 키스처럼 달콤하다.

신입 행원 연수를 마치고 뿔뿔이 부서로 흩어졌던 우리 동기들은 금세 연수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러면 아침 일찍 삼삼오오 만나 커피를 마셨다. 커피 한 잔의 담소談笑. 지금도 커피 한 모금 머금고 입 안에서 살살 돌리면, 그때가 떠오른다. 대학 시절에도 난 동무들과 커피를 즐겼다. 딸기잼 곁들인 와플을 한 잔의 라떼에 적시며 서로의 앞날을 이야기하곤 했다. 화제는 사랑과 진로, 이 시대와 인생을 넘나들었다. 그래서 커피 한 잔엔 내 젊은 날이 담겼다. 며칠 전 친구에게 새로 나온 책을 선물했다. 그 자리에도 커피가 있었다. 그가 산 모카커피는 감사의 징표, 내가 산 오렌지쿠키는 덤으로 건넨 마음이었다.

지구상의 수많은 전통 음료들이 각기 독특한 풍미風味를 자랑하지만, 커피만큼 대중적이지 못한 건 커피마니아 중에 영향력 있고 유명한 이들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세월 커피 속에 녹아들어간 갖가지 이미지는 그들의 것이 투영되고 두터워지며 굳어진 건 아니었을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친 하루를 사는 내게 커피는 편안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다시 내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출근을 한다면 너무 이상한 이야기일까. 우리 회사 커피숍에서도 오렌지쿠키를 팔았으면 좋겠다.


이종화 수필집 《구름옷》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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