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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 May 18. 2023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없다

[챕터] 어쩌면 당신의 가족

얼마 전 최장 3년 만기 계약직으로 취업한 사무실이 있는데 인수·인계받는 날 화장실 청소가 내 몫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건물 청소하는 분이 있긴 하지만 우리 사무실 내에 있는 남녀 화장실 청소는 내가 하는 거란다.


아, 이런... 그런 건 면접 볼 때나 결정하기 전에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를 어쩌면 좋지. 그냥 가지 말까. 화장실 청소는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할까. 인수·인계받은 날부터 세 달이 다 돼 가는 오늘 아침까지도 화장실 청소 전후로 며칠씩 고민해 왔다.


솔직히 화장실 청소는 우리 집에서도 하는 거니까, 그래그래! 할 수 있다 치자. 그렇지만 들어가 본 적도 없는 남자 화장실은! 마스크가 무용지물일 정도로 냄새부터 달랐고 너무너무 비위가 상해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나도 모르는 꼬인 속이 있는 건가? 커뮤니티에 물어봤다.


의견은 좀 나뉘었지만 "해본 적 없는 화장실 청소는 비위가 아무리 좋아도 거부감 들 수 있다, 보통은 면접 볼 때 업무 영역이나 주의사항에 대해 얘기해 주는데 사무직에게 화장실 청소를 말하지 않은 건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나도 그래서 그만둔 곳이 있다, 사진만 봐도 더러워 토 나올 것 같다, 전임자가 청소를 안 하고 살았거나 소변기가 너무 오래된 듯, 남자가 봐도 심각한 거 인정" 등의 이해와 공감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화장실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니고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대책이 필수인 나는 가장이기에 다른 직장을 알아보든 다시 공방을 오픈하든 주 수입원부터 만들고 나가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고 정리 중에 있었는데 오늘 아침 갑작스레 직원이 물었다.


"근무하시면서 힘든 건 없는지 위에서 물어보시는데, 혹시 힘든 거 있어요?"

"음... 남자 화장실 청소 말고는 업무적으로 힘든 건 아직 없습니다."

"그건 제가 할게요."

'?!'


두 달여간의 불편함이 대수롭지 않은 듯 1초 만에 해결 돼버렸다. 사실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없는 환경이기에 화장실은 개인 전용이나 다름없으니, 각자가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하며 꾸역꾸역 해왔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남자 화장실 청소는 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은 문제도 한 번 풀어볼까? 이 직장을 계속 다니려면 불쾌한 문제와 떨떠름한 문제, 유쾌하지 않은 문제들을 풀어야만 한다. 딸을 둔 엄마로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뻔뻔한 인간들이 더 이상 용서되지 않는 상처 입은 한 인간으로서.


문득 우리 엄마가 자주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입 뒀다 얻다 쓸래! 말 좀 해라. 말 좀 해! 그렇게 입 꾹 닫고 살면 너만 손해지. 아무도 안 알아줘, 이년아!"


그렇다. 역시 뭐든 말해야 알고, 말해야 한다. 나를 위해. 모두를 위해. 부모도 자식도, 사랑하는 연인도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알아도 모른다. 정확히 세세히 속속들이 다 알 수 없는 게 웃는 낯에 가려진 사람 속이니까.


우리 엄마 말이 하나 틀린 게 없는 걸 보면 역시 우리 순남씨는 성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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