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으로 근무한 지 1년 반 돼 가는 직장이 개관 38년 만에 폐관을 앞두고 있다. 모든 직장이 그러하듯 진상들도 있고 맘에 들지 않는 구석구석도 있었지만, 전에 없던 기회로 들어와 대체적으로 잘 있다 가는 것 같다. 하루 8시간씩 주 5일 최저 시급제로 근무하며 중식 제공 안 되고 4대 보험도 안 되는 곳이었지만, 늦바람으로 시작한 지 2년째인 만학도 놀이도 열심히 하고 우리 쁨이랑 약속했던 작가 놀이도 열심히 하고 고정 수입 없는 공방 놀이까지 간간히 하기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공방을 전업으로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실정이다 보니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부터 올려 두고 몇 군데 알아보았다. 그러다 며칠 전 지역 카페 커뮤니티에서 공고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원래는 만 39세까지만 지원 가능했던 기관이었는데 며칠 전, 만 49세 이하로 수정돼 있었다. 이럴 수가! 몇 달도 아니고 며칠 전. 때마침 지금이라니. 이것은 나를 위한 기회?! 긴장 반 설렘 반으로 문의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ㅇㅇㅇ 공고문을 봤는데 지원 연령이 만 49세 이하더라고요. 맞게 본 걸까요?"
담당자는 매우 상냥한 목소리로 모집이 너무 안 돼 처음으로 지원 연령을 늘린 거라며 지금 지원하게 되면 첫 번째이기에 합격할 것이라고 했다. 기회라는 생각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첫 번째여야 했기에 지체할 새 없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기획안, 포트폴리오 등을 후다닥 만들어 단숨에 제출했다.
20여 일쯤 지나자 면접 일시 안내 전화가 왔다. 더불어 내 접수를 시작으로 갑자기 지원자들이 몰려서 6명이 되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두 명 모집하는 데 여섯 명이라니. 그것도 부족해서 모두가 원래 모집해 오던 연령층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이렇게 좋은 날에. 담당자에게 물었다. 내가 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지.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전과 다른 태도로 답했다. “그땐 지원자가 없었어서. 그런데 어필을 잘하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아...
“엄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일단은 가 보려고. 되든 안 되는 가 봐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 될 일이라면 가야 되는 거지, 안 가면 안 가서 안 된 게 되는 거니까."
꽤나 용감하게 말했지만, 사실 종일 고민했다. 그냥 가지 말까. 헛걸음이지 않을까. 출발 직전까지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면접 장소로 향했다. 가면서도 고민했다. 어쩌면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는 건 아닐지.
도착하니 그새 1명이 더 늘어 7명이 돼 있었다. 하… 참 좋을 나이. 어딜 가도 걸림돌이 되지 않을 나이. 어디서든 환영받을 연령대들이 주르륵 앉아 있었다.
'음... 그냥 갈까?'
고민하는 사이 면접 순서가 정해졌고 내 순번은 세 번째였다. 5분에서 10분 정도 진행될 거라던 면접은 25분씩 소요됐다. 길어지는 시간만큼 대기실에 있는 동안 긴장감이 곱절로 늘어났다. 어쩌면 들러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파고들었다. 공고된 나이 때문에 형식적인 면접 대상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ㅇㅇㅇ님."
이윽고 내 이름이 불렸을 때 갈팡질팡이던 고민과 긴장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살아 보니 될 일은 어떻게든 되고, 안 될 일은 어떻게 해도 안 됐으니까. 일단 들어가 덤덤한 척 앉았다. 면접관들은 지금까지 중 내 나이가 처음으로 가장 많다고 했다. 서류 전형 담당자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던 말이기에 타격감은 제로였다. 아마도 마음을 내려놓아서 그랬던 것 같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네???"
"결과는 월요일에 나올 거예요."
"다른 분들은 되게 오래 걸리던데... 저 혹시 안 된 건가요?"
"연락드릴 거예요. 오시면 어린 친구들 잘 이끌어 주시고요."
7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면접. 알 수 없는 마지막 멘트. 촉이 맞다면, 연륜의 감이 맞다면 어쩌면 합격의 다른 말이었던 것 같은 멘트. 흠... 뭘까. 그래,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닌 거니까, 섣부른 김칫국도 마시지 말고 서둘러 실망도 말고 여러 잡생각 집어치우고 그냥 기다려 보자. 월요일에 발표한다고 했으니 어떤 결과든 오긴 오겠지. 나로서는 할 만큼 했다.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사무실로 복귀해 남은 업무를 마치고 퇴근했다. 퇴근 후 집 앞에 도착해서 휴대폰을 꺼내보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남겨져 있었다.
"여보세요, ㅇㅇㅇ입니다. 부재중 전화가 많이 왔어서요."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ㅇㅇㅇ ㅇㅇㅇ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희가 선생님과 함께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5월부터 오실 수 있으실까요?"
"네???"
"지난번 서류 전형 때 6월부터 가능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5월도 괜찮으실까요?"
"제가 된 거예요? 결과는 월요일에 나온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런데 선생님과 함께하고 싶어서요."
"5월도 괜찮긴 한데, 그럼 다른 분들은..."
"선생님까지 세 분 합격하셨고 나머지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셋이요?"
"아, 한 분이 4월 말에 갑자기 정리를 하기로 해서 한 자리가 더 생겼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하고 싶어서 먼저 연락드렸는데 하실 수 있는 거죠? 선생님과 꼭 함께하고 싶어서요."
"아 네.... 그럼 합격한 걸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네, 감사합니다..."
원하던 결과이긴 했는데 왜인지도 궁금했다. 왜 꼭 나랑 함께하고 싶다는 건지. 왜 갑자기 한 자리가 더 생긴 건지. 월요일 발표랬는데 면접 본 당일에 몇 시간 채 지나지도 않아서 급하게 전화한 건 왜 때문인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으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됐다고???"
그 통화를 옆에서 들은 쁨이도 함께 놀라며 기뻐했다. 원래 계획돼 있던 치킨이 기념 야식이 되는 순간이었다. 포기하고 가지 않았더라면 안 됐을 일이었는데, 역시 되든 안 되든 해 봐야 후회가 없고 될 일이라면 해야 되는 것이지, 안 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