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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 Apr 15. 2023

이 년은 오늘도 엄마가 보고 싶다

[챕터] 어쩌면 당신의 가족

든 자리 난 자리라는 말로는 부족한 빈자리

가고 없는 울 엄마의 빈 자리가 아무 때고 보인다.




어릴 적 찢어진 청바지나 자유분방한 스타일의 그런지룩을 입으면 우리 엄마는 500원이 부족했냐, 옷이 없냐 뭐가 없냐, 다 찢어지고 늘어진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다니냐며 귓불이 펄럭이도록 잔소리를 해댔다.


패션이라는 나의 말에 패션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그지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그게 무슨 패션이냐, 그지도 그렇게 어정쩡하게는 안 입는다, 그지를 하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확실하게 그지같이 하고 다리 밑으로 가든가, 안 그럴 거면 말짱한 옷으로 깔끔하게 입고 다니라며 나 없는 새 당신 마음에 안 드는 옷들은 싹 다 갖다 버려 버렸다.


부모 말이라고는 귓전으로 훨훨 날리던 내가 가만있을 리 없었으니, 버려진 것 이상으로 고집스레 사 들고 들어왔고, 돈부터 힘까지 모든 것이 나보다 우위에 있던 엄마는 보란 듯이 눈앞에서 가위로 자르고 찢어 불 속에 집어넣었다.


"계모야? 계모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계모가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 이년아!"


우리 엄마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엄마가 된 지금의 내 옷장엔 어떤 옷들이 자리하고 있을까? 오랜 직업의 특성상 정장류가 90퍼센트 이상이고, 우리 엄마가 그토록 싫어하던 그런 어정쩡한 그지 같은 옷들은 단 한 장도 없다. 우리 엄마 말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확한 콘셉트가 아니고서는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그 사실을 깨달은 지 어언 20년? 이번엔 새로운 그지 바람이 불어닥쳤다. 신발이다. 마트 갈 때나 비 오는 날 신으면 딱 좋을 것 같은 구멍 뽕뽕 난 신발. 시장 가면 몇천 원부터 만 원 대면 산다는 그런 신발을 이름 달린 신발 가게에서 6만 원 돈이나 주고 사고, 내 기준으로 욕실에서나 신을 법한 볼품없는 신발을 학교에 신고 가고, 회사에 신고 가고, 심지어 소개팅까지 신고 가다니 제정신이야? 슬리퍼도 아니고 샌들도 아닌 게 깨끗하기라도 하면 몰라. 밝을수록, 하얄수록 더욱 드러운 그지 같은 신발에 어울리지도 않는 액세서리들까지. 저건 대체 무슨 패션이니? 라며 외면했던 신발.


어릴 땐 귀엽고 예쁜 장화도 많았는데 발 사이즈 커진 성인이 되고 나니 농장에서나 신을 것 같은 디자인들뿐이고, 그거라도 예쁘게 신을라치면 센스 부족으로 미친년스러워, 어쩔 수 없이 비 오는 날에도 젖을 수밖에 없는 구두나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그러던 재작년쯤.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신고 있던 그 신발이 처음으로 깔끔하고 예뻐 보여 우리 쁨이도 저렇게 깔끔하게 관리하며 신기면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봄비 소식에 해마다 그랬듯 장화를 찾아 헤맸지만 역시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더라. 맞다, 그 신발이 있었지. 그 언젠가 쁨이에게 우리도 한번 신어 보자고 했었는데 그걸 잊고 있었네. 비 오기 전에 사자며 곧장 신발가게로 향했고 마음에 쏙까지는 아니지만 개중에 예쁘다 싶은 신발 두 켤레를 샀다.


늦은 밤, 쁨이와 함께 깔깔거리며 지비츠도 장식했다.

"와... 내가 이 신발을 사서 이러고 있을 줄이야."

"맞아, 우리 이거 드럽다고 싫어했잖아."

"그러니까. 진짜 웃긴다, 어이없어."


그 어이없는 신발을 일주일에 삼사일은 신나 보다. 신을 때마다 고민은 되지만 오랜 시간 짜여진 틀에서 벗어난 기분도 들고, 다른 슬리퍼들에 비해 뭔가 가벼워서 좋다.


뇌이징이겠지. 우리 신발이 되고 나니 예뻐 보이기만 하고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신발들도 웬만큼 드러운 상태가 아니고서는 별생각 안 드는 걸 보면.




‘뭐? 이깟 게 다 얼마? 20? 미쳤네. 미쳤어. 나이 먹고, 새끼까지 데리고 아주 그냥 쌍으로 잘하는 짓이다. 언제 철들래!’라고 금방이라도 소리치며 등짝 스매싱을 날릴 것 같은 우리 엄마가 보인다. 그려진다. 선하게.


전후 사정 듣기도 전에 소리부터 치던 우리 엄마. 끝까지 쫓아 와서 등짝 스매싱을 날려야만 직성이 풀렸던 우리 엄마. 세글자 이름보다 이년 저년 두 글자에 애정 담뿍 담아 호출하던 우리 엄마. 없는 살림에도 소풍 갈 때마다 오색 김밥에 간식거리까지 가방 가득 싸매주고, 생일 때마다 소고기미역국 한솥씩 끓여주고, 명절 때마다 꼬까신, 꼬까옷 사주던 우리 엄마.


돈 벌어 예쁜 옷, 예쁜 신발 사줬더니 가는 그날까지도 옷장에 아껴두기만 했던 우리 엄마.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입학식, 졸업식도 아닌 생일날에 난생처음으로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하며 "아가 엄마가 꼭 한 번 이렇게 해주고 싶었다"고 27살짜리 웬수같은 딸을 따듯하게 안아줬던 우리 엄마…


내 생일이 당신 생애에 마지막이라는 것을 예견이라도 했던 걸까. 미역국에 때 아닌 생태탕까지 한 솥 미리 끓여 생일상을 차려 주며 "우리 딸 이거 좋아하지? 많이 먹어"라며 가시 바른 생태 살을 하얀 밥 위에 연신 쌓아 올렸다.


"이게 뭐야, 드럽게! 나 밥 안 먹어!"

"아 그래그래 엄마가 미안. 자자, 자 어때. 이제 됐지? 먹어, 어서 먹어"


엄마는 생태와 탕 양념이 묻은 밥을 깨끗하게 덜어내며 나를 달랬다. 원래라면 '처먹지 마, 이년아! 안 먹으면 니 배고프지, 내 배고프냐!'라며 한참을 뭐라 뭐라 잔소리 했을 텐데 며칠 전부터 한 달가량을 그렇게 따듯하더니 차가운 첫눈과 함께 홀연히 떠나버렸다.




나는 지금도 울 엄마의 부드러운 살결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울 엄마의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우리 엄마가 있었더라면 그 돈이면 멀쩡한 구두를 사고 운동화를 샀어야지 돈이 남아도냐며 고막이 울렁이도록 잔소리를 다다다다 해댔을 거고,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았을 나는 내 돈 주고 내가 산다는 데 왜! 뭐! 라며 토 달았다가 등짝에 초강력 스매싱을 또 자처하겠지. 그리고는 말로 하라고, 그만 좀 때리라며 소리소리 질러댈 테고 울 엄마는 니가 말로 해서 듣는 년이냐며 끝까지 쫓아 와 한 대 더 때릴 거다.


이길 수 없어 화가 난 나는 죄 없는 신발을 집어던지고 안 신는다며 방으로 들어갈 테고 울 엄마는 '신지 마라, 이년아. 니 돈이지 내 돈이냐. 니가 아쉽지 내가 아쉬워!‘라며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턴 뒤 저기 저 신발장에 가지런히 정리할 거다…




있을 때 잘하자.

부디 살아생전에 잘하세요. 돌아가시고 나면 좋았던 날보다 궂었던 날들이, 잘했던 것보다 못했던 것들만 더 많이 떠오릅니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어요. 백날 천날 빌어도 용서받지 못하죠. 결코 생전으로는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나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말이지만요.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엄마가 내 엄마여서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고 감사하다고 아주 많이 얘기 하고, 너무 자주 안아드리세요.


부모가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말과 자식의 품이 부모에게는 기복 없는 최고의 힘이자 더 없는 위로가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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