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찢어진 청바지나 자유분방한 스타일의 그런지룩을 입으면 우리 엄마는 500원이 부족했냐, 옷이 없냐 뭐가 없냐, 다 찢어지고 늘어진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다니냐며 귓불이 펄럭이도록 잔소리를 해댔다. 패션이라 외치면 "패션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그지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그게 무슨 패션이냐, 그지도 그렇게 어정쩡하게는 안 입는다, 그지를 하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확실하게 그지같이 하고 다리 밑으로 가든가, 안 그럴 거면 말짱한 옷으로 깔끔하게 입고 다녀"라며 나 없는 새 당신 마음에 안 드는 옷들은 싹 다 갖다 버리고 태워버렸다.
"계모야? 계모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계모가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 이년아!"
우리 엄마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엄마가 된 지금의 내 옷장엔 어떤 옷들이 자리하고 있을까? 오랜 직업의 특성상 정장류가 90퍼센트 이상이고, 우리 엄마가 그토록 싫어하던 그런 어정쩡한 그지 같은 옷들은 단 한 장도 없다. 우리 엄마 말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확한 콘셉트가 아니고서는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그 사실을 깨달은 지 어언 20년? 이번엔 새로운 그지 바람이 불어닥쳤다. 신발이다. 마트 갈 때나 비 오는 날 신으면 딱 좋을 것 같은 구멍 뽕뽕 난 신발. 시장 가면 몇천 원부터 만 원 대면 산다는 그런 신발을 이름 달린 신발 가게에서 6만 원 돈이나 주고 사고, 내 기준으로 욕실에서나 신을 법한 볼품없어 뵈는 신발을 학교에 신고 가고, 회사에 신고 가고, 심지어 소개팅까지 신고 가다니 제정신이야? 슬리퍼도 아니고 샌들도 아닌 게 깨끗하기라도 하면 몰라. 밝을수록, 하얄수록 더욱 더러운 그지 같은 신발에 어울리지도 않는 지비츠들까지. 저건 대체 무슨 패션이니? 라며 외면했던 그 신발 바람.
어릴 땐 귀엽고 예쁜 장화도 많았는데 사이즈 커진 성인이 되고 나니 농장에서나 신을 것 같은 디자인들뿐이고, 그거라도 예쁘게 신을라치면 센스 부족으로 미친년스러워, 어쩔 수 없이 비 오는 날에도 젖을 수밖에 없는 구두나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 그러던 재작년쯤.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신고 있던 그 신발이 처음으로 깔끔하고 예뻐 보였다. 우리 쁨이도 저렇게 깔끔하게 관리하며 신기면 예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봄비 소식에 쁨이와 함께 곧장 신발가게로 가서 두 켤레를 사들고 와, 늦은 밤까지 깔깔거리며 지비츠를 장식했다.
"내가 이 신발을 사서 이러고 있을 줄이야."
"맞아, 우리 이거 더럽다고 싫어했잖아."
"그러니까. 진짜 웃긴다, 어이없어."
그 어이없는 신발을 일주일에 삼사일은 신고 다닌다. 우리 신발이 되고 나니 예뻐 보이기만 하고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신발들도 웬만큼 더러운 상태가 아니고서는 더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문 앞에 앉아 그 신발을 보고 있으니 우리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가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뭐? 이깟 게 다 얼마? 20? 미쳤네. 미쳤어. 그 돈이면 멀쩡한 구두를 사고 운동화를 샀어야지 돈이 남아도냐! 나이 먹고, 새끼까지 데리고 아주 그냥 세트로 잘하는 짓이다. 언제 철들래!" 라며 고막이 울렁이도록 잔소리를 다다다다 해댔을 거다. 그럼 또 가만히만 있지 않았을 나는 "내 돈 주고 내가 산다는 데 왜! 뭐!" 라며 토 달았다가 등짝에 초강력 스매싱을 자처하겠지. 그러면서 말로 하라고, 그만 좀 때리라며 소리소리 질러댈 테고 그럼 또 울 엄마는 네가 말로 해서 듣는 년이냐며 끝까지 쫓아와 끝끝내 한 대를 더 때릴 거다. 상상하니 웃음이 나네.
이길 수 없어 화가 난 나는 죄 없는 신발을 집어던지고 안 신는다며 방으로 들어갈 거고 울 엄마는 '신지 마라, 이년아. 니 돈이지 내 돈이냐. 니가 아쉽지 내가 아쉬워!‘라고 말하며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턴 뒤 신발장에 가지런히 정리할 거다.
전후 사정 듣기도 전에 소리부터 치던 우리 엄마. 끝까지 쫓아와서 등짝 스매싱을 날려야만 직성이 풀렸던 우리 엄마. 세 글자 이름보다 이년 저년 두 글자에 애정 담뿍 담아 호출하던 우리 엄마. 없던 살림에도 소풍 때마다 오색 김밥에 간식거리까지 책가방 가득 싸매주고, 생일 때마다 소고기미역국 한솥씩 끓여주고, 명절 때마다 꼬까신, 꼬까옷 사주던 우리 엄마. 돈 벌어 예쁜 옷, 예쁜 신발 사줬더니 가는 그날까지도 옷장에 아껴두기만 했던 우리 엄마.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입학식, 졸업식도 아닌 생일날에 난생처음으로 커다란 꽃다발 선물과 함께 "아가 엄마가 꼭 한 번 이렇게 해주고 싶었다"라며 27살짜리 원수 같은 딸을 따듯하게 안아주었던 우리 엄마. 내 생일이 당신 생애에 마지막이라는 것을 예견이라도 했던 건지, 미역국에 때 아닌 생태탕까지 한 솥 미리 끓여 생일상을 차려 주며 "우리 딸 이거 좋아하지? 많이 먹어"라며 가시 바른 생태 살을 하얀 밥 위에 연신 쌓아 올렸다.
"이게 뭐야, 더럽게! 나 밥 안 먹어!"
"아 그래그래 엄마가 미안. 자자, 자 이제 됐지? 먹어, 어서 먹어"
생태와 양념이 묻은 밥을 깨끗하게 덜어내며 나를 달랬던 우리 엄마. 원래대로라면 '처먹지 마, 이년아! 안 먹으면 니 배고프지, 내 배고프냐!'라며 한참을 뭐라 뭐라 잔소리했어야 정상인 건데, 그땐 그걸 왜 못 알아챘을까... 한 달가량을 그렇게 따듯하기만 하더니 차가운 첫눈과 함께 홀연히 떠나버렸네. 나는 지금도 이렇게 엄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생생하게 들려오고 짙은 눈코입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엄마의 부드러운 살결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늘 나던 엄마 냄새도 여전히 그대론데, 엄마만 여기에 없다.
있을 때 잘할걸. 생전에 잘할걸. 죽고 나니 보고 싶어 미치겠다. 죽고 나니 좋았던 날보다 궂었던 날들만, 잘했던 것보다 못했던 것들만 생각나고 그 흔하디 흔한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내가, 엄마가 내 엄마여서 고맙다는 말을 단 한 번도 전하지 않았던 내가, 엄마의 고생을 빤히 알면서도 철없게만 굴었던 내가 원망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