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자 May 12. 2023

결국, 그녀는 살아남았다

[챕터] 어쩌면 당신의 일상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흥미를 갖는 경우는 크게 두 경우더라. 그게 무엇이든 자기보다 나은 게 있어 시기 질투로 불타오르거나, 그들의 고약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를 발견했을 때.


반대로 그들이 나에게 흥미를 갖지 않는 경우도 크게 두 경우더라. 내가 더 이상 그들의 시야에 보이지 않거나, 그들의 고약한 시선 앞에 주눅 들지 않는 담대함으로 응수했을 때.




'잘살고 있겠지?'

사무실 탁자에 놓인 디퓨저를 보다가 작년까지 운영했던 공방에서 만난 한 수강생이 떠올랐다.


회사 퇴근 후 고민 상담을 하고 싶다며 오후 6시경 갑자기 찾아왔던 수강생이었는데 오는 동안 얼마나 울었던지 예쁜 눈이 새빨갛게 퉁퉁 부어있었다.


"선생님... 저 직장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말도 제대로 이어 나가지 못한 채, 그날 개봉한 미용 티슈 한 박스를 다 쓰고 갔을 정도로 자정이 넘을 때까지 눈물 콧물을 거리낌 없이 펑펑 쏟아냈다. 한참 수업 오던 시기에 직장 내 소문과 따돌림으로 힘들어하던 수강생이었는데 한동안 연락이 없어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더니 아니었단다.


몇 번이고 연락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내 시간 뺏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에 연락하지 못했었다고. 부모님은 걱정하실 테고, 주변엔 믿고 의논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 끝에 찾아온 거라며 연거푸 죄송하다고 했다.


"아니, 나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편하게 얘기해요..."


직장 동료들은 그녀에 관한 소문 때문에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말을 걸어도 투명 인간 취급하듯 대놓고 무시하고, 스쳐 지나갈 때도 눈을 흘기며 수군거리고 바로 옆에 있는데도 다 들리도록 짓궂은 험담을 늘어놓는다며 힘들어했다.


도대체 무슨 소문이었길래. 나는 묻지 않았다. 내 성격이 좀 그런 데가 있다. 상대방이 먼저 말하지 않는 한 웬만해서는 묻지 않는다. 특히나 말하는 이가 자기 말을 많이 아끼고 있다고 느낄 때는 더욱 그렇기에 정황을 몰라 갑갑할 때도 있고 상황 파악이 안 돼 답답할 때도 있지만, 결론은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심상이라는 정도쯤은 살필 수 있으니 열심히 들어주고 오직 그의 편에서 위로와 응원 정도만 건네는 편이다. 진심으로.


그녀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직원들의 태도 때문에 더 이상 못 다닐 것 같다고 했다. 그냥 그만둬야 할 것 같은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며, 나 같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솔직히 나라면 소문의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진작에 그만둬 버렸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직원들을 빼면 직장은 어때요?"

"괜찮아요. 직원들만 아니면 계속 다니고 싶어요..."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비워진 티팟에 온수를 받으며 생각했다. 뭐라고 답해줘야 할까. 오늘은 위로도 응원도 아닌 현답을 들으러 온 것 같은데. 어쩌면 인생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는 걸텐데. 내가 지금 가타부타 왈가왈부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왕복 두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 온 사람에게 나는 모르겠으니 본인 일은 본인이 알아서 잘 판단해야 한다며 무심히 돌려보내는 건 더욱 아닌 것 같고. 심히 부담스럽다.




나도 직장 내 소문이라는 것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타지역 사업단에서 팀장으로 내정된 이후 조직 개편에 따라 거주지에 있는 사업단 내 새로운 근무지에서 팀장직을 맡게 됐는데, 나로 인해 자신들의 동료가 승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갖 텃세를 부리며 나를 너무도 고약하게 괴롭혔었다.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 혈안이 돼 있던 그들, 내 편 하나 없던 그 쓰레기 집단 소굴에서 싸워봤자 나만 손해일 게 분명했고 종국에는 내가 그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는 뻔한 비디오였다.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될 나는 가장이었기에 다른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믿었던 유일한 존재. 나의 예수는 어느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도로에서 접촉 사고를 당했고 입원해 있던 사이 불길한 예상적중은 했으니까. 빼곡한 일정과 책임감을 강요하던 회사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아직은 이르다는 의료진의 말을 무시한 채 퇴원 수속을 마쳤던 날, 직급 해제 통보를 받았다. 사실상 해고나 다름없는 처사였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업의 추잡스러운 배신이었다.


'열심히 살면 가혹한 현실 정도는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한 달 이상 고정 수입이 끊기게 되면 가계(家計)는 점점 불안정해질 것이다. 아직은 고생이 뭔지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멋있는 줄 아는 우리 쁨이를 위해서라도 보이지 않는 존재를 원망하며 낙담할 여유 따위는 부릴 수 없었다. 얼마 후 드디어! 내가 믿었던 그 신이 나타난 줄 알았다. 경쟁사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제의를 받은 뒤 입사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었으니까 .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전 직장에서 나를 괴롭히다 그만둔 주범 중 한 명이 그곳에 있었고 불길한 예상은 적중했다. 그 여자가 쳐 놓은 고약한 비방질로 인해 출근 첫날부터 일면식도 없던 이들이 이미 나를 아는 눈치로 은근히 따돌리며 경계했고 나는 끝내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이전 직장에서 내가 본인의 자리를 뺏었다는(그건 본인 착각이고 희망 사항일 뿐, 그럴 깜냥이 전혀 안 된다며 전 직장 단장은 그 여자를 또라이라고 했었음) 둥, 나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리를 뺏겼다는 둥, 애 데리고 혼자 산다는 등등...


인간들은 왜 사람을 겪어보지도 않고 뜬 소문에만 꿰맞춰 바라보고 평가하고 판단질만 하는 걸까. 인간들은 왜 멀쩡한 눈을 놔두고 귀로만 사람을 탐색하는 걸까. 왜. 대체 왜!


결국 나는 진저리나는 그 업계를 영원히 떠나왔고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그 여자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업무 태만에 조직 내 분탕질만 일삼다가 짤렸댄다. 쌤통이지! 잘 됐지!" 나보다 나이가 많던 그 여자는 나처럼 책임지고 지켜야 할 자식이 있는, 애 데리고 혼자 사는 싱글맘이었다.




수강생인 그녀는 한참 뒤 화장실에서 돌아왔고 나의 답은 누구라도 꺼내 놓을 만한 뻔한 두 개의 답으로 나뉘었다. 계속 다니고 싶다면 버티거나 못 버티겠다면 떠나거나. 그녀는 두어 달 동안 드물게 소식을 전해왔고 배웅하던 날 흘렸던 나의 마지막 말에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차피 받아주지도 않는 인사, 나 같으면 안 할 거라고 했더니 그녀도 안 한다고 했다. 어차피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아무리 잘해도 흠집 내기 바쁠 테니 그러거나 말거나 그만두는 날까지 내 할 일만 똑바로 하겠다고 했더니, 그녀도 그 모든 쌩지랄들 죄다 무시하고 재 할 일만 열심히 하는 중이라고 했다. 부끄러울 게 없다면 흘겨보거나 말거나 나는 당당하게 정면 응시하고 걷겠다고 했더니,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위축은 되지만 그녀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고 했다.


아니 나는 결국 못 버티고 그만둘 것 같다면 쭈글탱이 짓은 그만할 거다 뭐 이런 뜻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써 먹냐. 그게 또 보통의 성질머리, 멘탈로는 안 될 심리전일 텐데 안 먹히면 어쩌려고 그러고 있다는 건지. 나는 걱정했고 상상 이상으로 그녀는 의연했다.


"선생님 저 이제 잘 지내요. 회사도 계속 다니려고요. 안 그만둘 거예요.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그녀의 마지막 안부에 나는 안도했다. '다행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 년은 오늘도 엄마가 보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