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허물없는 사이일지라도 최소한의 예의와 지켜야 할 선은 지키며 살자.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어려울 게 하나 없다. 입장 바꿔 생각했음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나는 나고 그는 그니까. 인간관계는 역지사지할 때 가장 아름답고 평화롭더라. 이기적이고 무모한 모험은 관계의 상실만을 직면할 뿐.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기본적인 것들을 상실했을 때부터 상실되더라.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면 다른 사람의 개인 정보를 아무렇게나 열람할 수 있는 거냐는 문의 글이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왔다. 개인정보보호법에 걸려 안 된다고들 했지만, 게시자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사 간 집 주소를 어떻게 알고 선물을 보냈겠느냐며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과 입이 글에서 보이는 듯했다. 그 언젠가의 나처럼.
몇 해 전 급속도로 가까워진 이웃이 있었다.
오가다 마주치면 인사 정도만 나누던 사이였는데 어떤 이유로 서로의 빗장을 조금씩 열어 보이게 되면서 가족들끼리 만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왕래도 하며 금세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행정기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이웃의 아들에게서 내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담긴 민원서류 한 장이 톡으로 날아왔다.
며칠 전 그들과 나누던 대화에서 "나는 그게 자격 미달 이래서 포기했다"라고 말한 부분이 있었는데 본인이 확인해 보니 자격 미달이 아닌 실명 오류에 의한 것이었다며 실명인증 후 재신청하면 승인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덧붙여 본인이 오지라퍼라서 내게 도움을 주고자 제멋대로 동의서에 사인하고 개인 정보를 열람했다며 죄송하다고, 이해해 달라고도 했다.
이해? 무슨 이해? 미친놈인가? 뭘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지? 아무리 오지랖이 넓다 한들 그 정도까지 어긋나는 오지랖은 이전에도 이후로도 보고 들은 적이 없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행하기 전 다 안다. 마땅히 해도 될 행위인지 하지 말아야 할 행위인지.
내 주민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내 개인정보는 어디까지 털려버린 걸까? 타인의 개인정보를 열람하는 게 그렇게나 쉬웠단 말인가. 난생처음 겪는 무개념 처사에 소름이 돋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용서가 되지 않을 만큼 화가 치밀었지만, 그 아들이 가장이나 다름없다는 이웃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민원은 따로 제기하지 않았다. 내 아량은 딱 거기까지였고 한 번 무너져 버린 신뢰는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절교를 선언한 건 아니었지만 거리를 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절되었다.
그들은 그 잘못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선의였다는 터무니없는 말로 억지를 부리겠지. 나는 지금까지도 불순한 의도였다는 생각 외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데. 그들은 또 좋은 마음으로 도와준 호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겠지. 원하지 않았던 내게는 인간관계에 있어 새로운 불신만을 심어준 소름 돋는 인간들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그로 인해 내 기준에서 선함이 없는 오지라퍼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아주 그냥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 낄 때 안 낄 때 구별 못해서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질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짜증 나는 참견쟁이와 타인의 사적인 영역까지 파고들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본인의 호기심 갈증을 해소하는 아주 음흉한 인간. 사실 후자는 오지라퍼라고 치기에는 그 행위가 엄중한 사안이 될 수 있으니, 디케의 선물을 받게 될 경향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제발 착각 좀 하지 말자.
유대 관계는 유대 관계일 뿐 싫은 건 싫은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다. 상대방이 침범이라고 하면 침범이다. 관심과 사랑도 상대방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나 정상인 것이지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간섭이고 집착이고 불순함일 뿐이다. 상대방이 느끼는 불쾌감을 내 기준에 맞춰 미화시키려는 짓 또한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나 다름없다. 관심과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저지르는 독선의 끝은 상실 외에 다른 게 또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