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첫 구절이다. 가을이면 괜스레 한 번씩 읊어줘야만 할 것 같은 구절이기도 하다.
사실 요즘은 예전만큼 시 읽기를 즐기지 않는다. 돌아보니 올해는 가을이 오기 전까진 단 한 권의 시집도 읽지 않았다. 삶에 찌들었는지, 명확한 것이 좋아져서 그런지 근래 나온 시들은 그 속에 녹아있는 언어가 마음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은 압축되어 정제된 말에 품은 시인의 감성을 느끼고 싶어서 시집을 읽곤 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하여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 보다가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도 펼쳤다. 제목은 참 마음에 들었으나 내용은 너무나도 어려웠던 책. 그래도 그 책이 내 독서의 주파수를 시집으로 살며시 돌려놓았나 보다. 도서관 신착도서 서가에서 다른 책이 아닌 ‘시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애송명시’를 골랐던 것을 보면. 한국을 대표하는 246명의 시인이 고른 52편의 시가 담긴 이 책은 전문가(시인)에게든 비전문가(나)에게든 좋은 시는 모두의 마음을 두드린다는 것을 알게 했으며, 시를 좋아하던 시절로 나를 이끌었다.
고등학생 때가 시를 제일 많이 접하고, 읊고, 좋아했던 것 같다. '문학소녀' 같은 간질간질한 감수성 때문은 아니었다. 그땐 국어 교과서 외에도 문학 교과서가 따로 있었다. 공부만 아니면 다 좋았을 시기라, 심심하면 문학 교과서를 읽었다. 선생님한테는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위장용이랄까. 하지만 허송세월만 보낸 건 아니라, 그때 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시들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정말 좋은 시들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한 줄 한 줄 분석하며 화자는 누구이며, 이 단어는 무슨 뜻이며, 이 시의 주제는 어떠한가를 톺아보아서 그랬는지 오랜만에 다시 보는 시들인데도 기억이 눈보다 빨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은 윤동주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그를 꼽지 않을까?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구 할은 하도 자주 읽어서 저절로 외워졌다. 단어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리 섬세하고 고아한지. 그의 삶은 시와 닮아있었고 그래서 시도, 시인도 좋았다. 물론 단정하고 차분한 미남이라 좋아했던 이유도 있다.
소장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제일 좋아하는 시 구절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이 구절은 천 번은 넘게 봤을 텐데도 볼 때마다 전율을 준다. 특별할 것 없는 단어들로 어떻게 이렇게 애절한 문구를 만들 수가 있을까? 작가들은 일단 기본적으로 천재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런 구절은 감히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었다고 본다.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편인 소설이나 에세이와는 달리, 시는 한 템포 쉬어가며 음미하며 읽게 된다. 단어와 단어 사이, 연과 연 사이 숨겨진 시인의 생각을 다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렇게 여유를 느끼며 곱씹는 것이 좋다. 빼곡하게 차있던 올해도 이제 많이 덜어졌다. 나의 일상도 좋은 시처럼 군더더기는 버리고 곱게 빚어놓은 단어들만 남으면 좋겠다. 올해의 끝맺음을 잘할 수 있도록, 짧아서 아쉬운 이 가을에는 시를 읽으며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