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재도전기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여학생 대표로 선서를 하기 위해 구령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올라오라는 사인만 떨어지면 구령대 위에 올라 남학생 대표와 함께 신입생 선서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입생 대표로 선서하는 애 재수 없어, 죽여 버려!”
나는 그 아이들을 본 적도 없었고, 지금도 얼굴을 모른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 역시 처음 보는 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황했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는 선서를 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그렇게 나를 향해 날아왔던 타인의 칼날을 그대로 품고 선서를 마쳤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한 번은 학교 대표로 다른 학교로 영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하러 갔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건너편에서 오던 여학생 한 무리가 면전에 대고 내게 말했다. “영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하러 오는 애들 재수 없어!” 이때도 나는 뜻밖의 말에 당혹스러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열심히 대회에 임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부터 타인에게 부정적인 말을 많이 들었다. 한마디로 욕받이 었다. 물론 내가 동급생들의 미움을 살만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공부로 정체성을 찾았던 나는 내가 생각한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고개를 박고 울곤 했다. 타인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정체성이 흔들리는 문제였다. 친구들 눈에 이런 내가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과 상관없이 정말 그냥 숨만 쉬어도 욕을 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앞에서 언급한 두 사건들이 대표적으로 그런 일들이었다. 나를 비난한 사람들은 나를 처음 봤던 사람들이었고 그냥 내가 선서를 하는 것도,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는 것도 그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큰 상처가 되었다. 섬세하고 예민했던 나에게 타인의 몰이해와 지지의 결여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나는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울타리를 치고 마음을 열게 된 사람들 외에는 내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나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모순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럼에도 타인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일대일의 관계는 어려웠고, 오히려 일대다가 편했다. 이유인즉슨 일대일로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는 나의 본모습을 드러내야 하는데, 나의 어떤 모습이 또 타인의 심기를 건드려서 비난받을지 알 수 없었다.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면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일대다는 달랐다. 가령, 영어 말하기 대회를 나간다든지 토론대회를 나가면 나는 그 순간만큼은 연기를 하면 되었다. 대회 참여자로, 토론자로 나의 본모습을 감춘 채 연기를 하면 모든 게 잘 진행되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치고 연기를 하며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어쩌면 가장 오랫동안 아나운서라는 꿈을 가졌던 것도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보던 단정하고 지성적인 아나운서의 모습. 누가 봐도 완벽한 그 모습이 되어 나를 드러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일까. 나는 열 살 무렵부터 아나운서를 꿈꿨고, 스물여섯이 되어서야 겨우 그 꿈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 앞에 서면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긴장되거나 실수할까 봐 떨려서가 아니었다. 그냥 카메라 앞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심장이 너 지금 정말 행복한 거라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너무 못생기게 나와서 ‘내가 저렇게 생겼나?’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아나운서 헤어 메이크업도 배우고 여러 차례 카메라 앞에 서 버릇하니 나중에는 내가 봐도 흡족할만한(?) 모습이 나왔다. 사투리 억양과 아투가 배어있던 말투도 서서히 고쳐졌으며, 그렇게 꿈을 위해 다듬어지는 내 모습이 좋았다. 그러나 이렇게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과 달리 내 마음 한편에는 어릴 때부터 가졌던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방송을 하게 되어 불특정 다수 앞에 서게 되면 또 욕을 먹을까 봐 두려웠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보이는 단면적인 모습으로만 판단하여 나를 또 얼마나 깎고 돌리고 베어낼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또 두려워졌고 어느 순간 아나운서 준비를 그만두게 되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었을까. 로펌에서 나온 뒤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아나운서 준비와 행사 MC 준비였다. 아무리 나이 제한이 없어졌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나이는 중요한 고려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정말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아나운서 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행사 MC는 나이보다는 전문성과 경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병행해서 준비했다. 나보다 어린 아나운서 선생님께 수업을 듣고, 이보다 더 어린 아나운서 지망생들과 스터디를 했다. 이전에는 주로 대형사 위주로 시험을 봤다면 중소형 방송사, 인터넷 방송국은 물론 전혀 관심 없던 외신 경제 방송, 스포츠 방송까지 응시했다. 외신 경제 방송국에서는 프롬프터에 떠 있는 영어뉴스를 보고 직독 직해하는 시험을 봤다. 영어인 데다 너무도 긴장한 탓에 하얀 건 프롬프터 바탕이요 까만 건 글씨였고, 덜덜 떨면서 어떻게든 하긴 했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스포츠 방송국에 시험을 보러 갈 땐 저 멀리 일산까지 갔는데 그날따라 돌풍이 불어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치열한 예약 경쟁에 밀려 처음 가는 미용실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았더니 웬 80년대 미스코리아가 되어서 나왔다. 그리고 그 꼴로 돌풍을 뚫고 일산까지 씩씩하게 가서 씩씩하게 시험을 봤다.
이렇게 별의별 에피소드를 남기며 아나운서 준비를 했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준비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전처럼 더는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물론 나이의 문제도 있었지만, 이쯤 했으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시도조차 하지 않는 나이에 전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을 했다. 그것도 전에 없이 즐겁게 또 열심히. 될까 안될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기적적으로 아나운서가 되면 대중에게 비난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괜한 우려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날 위해 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미련을 떨치기 위해, 다시 한번 카메라 앞에 서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그렇게 있는 힘껏 내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 이렇게 하다 보니 어느 날 내 마음이 내게 말했다. 이제 이만하면 됐노라고. 나를 위해 애써줘서 고맙고, 즐겨줘서 고맙다고. 더는 날 외면하지 않고 돌아봐줘서 난 이제 괜찮다고. 그렇게 나는 가장 오랫동안 가졌던 꿈을 비로소 고이 보내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