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어느 날, 운명처럼 찾아왔다고 했다

뜻밖에 찾아온 미술과의 만남

by 수인

11월은 내게 애매한 달이다. 일 년을 마무리하기에는 12월이라는 화려한 녀석이 남아있다. (내게 12월은 반짝거리는 연말을 품은 화려한 달이다. 일 년을 마무리하는 아스라한 마음보다는 축제처럼 지난 일 년을 기념하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렇다고 가을이라고 보기에는 파란 하늘이 빛을 잃어 회색으로 변해가고, 이파리들은 고개를 떨구기 시작한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계절이 시작되기에, 가을과 겨울의 경계 사이에 있기에 그 애매함은 늘 배가 된다. 이런 모호한 달에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한 해를 돌아볼 수도, 다른 한 해를 계획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시간, 그 시간 속에서는 그저 관성대로 살아가는 것 밖에는 달리 가능한 게 없었다.


4년 전 그날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페이스북을 보며 스크롤을 죽죽 내리고 있던 그때, ‘큐레이터 학교’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큐레이터 학교? 일단 제목부터 매력적이었다. 큐레이터라… 이 직업은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사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환상을 가지고 바라보기에 아주 최적화된 직업이다. 어쩐지 고고하게 느껴지는 미술관 속을 도도하게 걸어 다니는 프로페셔널하고 우아한 모습 (은 TV 속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이고, 보통 큐레이터들은 일하기 편한 옷을 입고 주 업무와 함께 각종 잔 업무를 처리하기에 바쁘다. 규모가 작은 미술관에서는 페인트칠과 못질도 직접 할 때가 있다. 이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라.) 어찌 되었건, 나도 취미로만 미술을 접했던 사람으로서 큐레이터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홀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그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미디어 속 큐레이터의 우아한 모습, 드라마 <그녀의 사생활> 중


미술관에서 드릴을 사용하고 있는 현실의 모습, 아직 현장일에 덜 데인 건지 나는 이렇게 몸 쓰는 일이 즐거울 때가 종종 있다.


큐레이터 학교는 (사)서울특별시미술관협의회가 주최하고 서울시가 후원한 프로그램으로, 미술계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들과 미술에 관심 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서울시 내 10곳의 사립미술관을 탐방하며 관장, 큐레이터, 에듀케이터, 레지스트라 등 미술계 각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 각지의 미술관을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값진 경험이었고, 미술관이 문을 닫은 시간에 어둑어둑해진 공간에서 강의실만 환하게 불 밝혀 강의를 듣는 기분도 몹시 짜릿했다. 마치 비밀의 공간 속에 초대되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눠 듣는 동조자가 된 느낌이었다. 강의해 주신 분들이 미술계와 큐레이터라는 직업, 그리고 전시기획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고, 그분들의 철학, 가치관, 인생을 대하는 태도 등도 같이 엿볼 수 있어서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 또, 하나의 전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과 마음이 오가고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지를 알게 되어서 전시를 감상할 때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었으니, 바로 성북구립미술관 관장님의 말씀이었다. 큐레이터라는 길이 운명처럼 찾아왔다고. 때로는 기회란 게 있고, 운명이란 게 있다고, 간절히 오랫동안 원하면 찾아오게 된다고 하셨다. 강의 내내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게 느껴져서, 한 번도 내 일을 사랑해 본 적 없었던 나에게 매우 기분 좋은 신선한 충격을 주신 관장님은 그렇게 나에게 운명에 대한 기대 또한 안겨주셨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나에게도 운명처럼 다가오면 좋겠다고.


애매하게만 느껴지던 것이 뜻밖의 희망의 씨앗을 품고 다가왔을 때, 나는 아무런 기대도 확신도 없었다. 다시 했던 아나운서 준비는 끝을 향해가고 있었고, 병행하던 행사 MC 가 되는 기회도 쉽사리 주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내 안에는 또 어떤 선택지가 있었지? 내 마음을 휘휘 저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꿈이 나를 두드렸다. 아직 꿈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만 꿈으로 자라날 소지가 분명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게 우연처럼 혹은 운명처럼 찾아온 것에 희망을 품고 조금씩 다가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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