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행복하고 싶었다. 까마득한 옛날,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7살이 되던 해에,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화가가 되고 싶었다. 10살 때는 영어가 재밌어서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어린 나에게 ‘영어를 잘하는 사람’하면 떠오르는 직업이 외교관 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텔레비전 속에 나오는 단정하고도 지적인 아나운서가 멋져 보여서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고, 고등학생 때는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홀딱 반해 영문학을 공부하기를 희망했다. 나는 언제나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건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 ‘무언가’가 나의 행복을 뾰로롱! 하고 이루어주는 요정의 지팡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가 기대어 나아갈 지팡이를 찾아 헤맸다.
로펌을 다니면서 육두품 인생이라는 자괴감에 괴로웠지만, 더 괴롭고 힘든 건 내 행복이 타인에 의해 재단당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행복을 좇았음에도 행복이란 내게 어쩐지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는 일명 ‘마법의 성’이 있었다. 경영 대학을 칭하는 말이었는데 이유인즉슨, 교문에서부터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경영 대학이 보이지만 그곳을 향해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도착하기 어렵다는 데서 생긴 별명이었다. 나에게는 행복이 바로 ‘마법의 성’ 같았다. 걸어도 걸어도 당최 도달하기가 어려웠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행복하지 않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확실한 위계질서 사회에서 메인 스트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승리자로 여겨지는 사람들 눈에 도태된 사람들은 불행해 보였다. 그들의 은근한 언행에서 보이는 행복과 불행의 재단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나에게 이곳은 타인들의 전체성이 개인의 개별성을 지배하는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그래서 덫에 걸린 쥐처럼, 혹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그렇게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들의 행복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들은 그게 행복이라고 나에게 주삿바늘로 행복으로 위장한 고통을 계속 주입하니까. 나는 그렇게 서서히 물들다가는 정말로 약물 과다로 죽어버릴까 봐 도망쳐 나왔다.
자신이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걸까? 그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원래 타고나게 조직에 맞는 사람인 걸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는 아는 걸까? 아니면 '세상은 원래 이래'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걸까? 자신대로 사는 걸까? 자신이 아닌 대로 사는 걸까? 자신이 아닌 대로 살아도 중심부에 자리 잡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게 행복하다고 여기는 걸까? 그건 그 사람의 행복일까 주입된 행복일까? 진짜일까. 가짜일까. 나는 행복의 영역에서도 반동분자였다.
국내 최고의 로펌에 다닌다고 하면 한마디로 있어 보였다. 뭐가 그리 있어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어 보였던 건 확실하다. 내가 회사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나조차도 뭔지 모를 꿈을 꾸고 있을 때 나와 친하게 지내던 회사 동생이 한 마디 했다.
“언니는 자기 연민이 심한 것 같아요, 언니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해요”
맞는 말이었다. 좋은 대학교 나와서 괜찮은 연봉에 이름도 있는 회사를 다니는 이십 대 후반의 여자.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피부관리숍에서 관리를 받고, 때때로 공연을 보러 다니며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훌쩍 해외여행도 가는, 자기 돈으로 할 거 다 하는 팔자 좋은 여자. 삶에 대한 만족도가 제일 높다는 미혼의 20대 후반 ~ 30대 초반 여자. 바로 내가 속한 그룹이었다. 나도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내 삶을 부러워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처럼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타인과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완벽해 보이는 행복이 나에겐 행복이 아니었고, 또 다른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불행해 보이는 인생 또한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행복을 내가 규정하지 못한 삶은 이렇게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졌다. 보는 시선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내 인생의 행복의 총량.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행복에 보이기도, 불행해 보이기도 하는 내 행복의 모습. 이 모든 게 행복의 재단 같았다. 마음대로 늘이고 줄이고 이리저리 깎아 돌려보는 나의 행복, 타인이 보는 행복? 사회가 요구하는 행복? 아니 나의 행복. 그렇게 행복을 좇던 아이는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춘 채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