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어두운 밤을 핑계 삼아 흐르는 눈물을 모른 척하며 길을 걸었다.
입사한 지 겨우 3개월, 지속적인 야근에 밤길을 걷기 일쑤였던 나는 하루 내내 애써 참았던 눈물을 집에 가는 길에 터트리곤 했다. 그때 주로 들었던 노래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넘버인 “새장 속에 갇힌 새”였다.
새장 속에 갇혀버린 새
다시 날 수 있을까
버려진 아이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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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넘버 “새장 속에 갇힌 새”
나는 늘 새장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꿈 찾겠다고 스물여섯에 들어간 첫 번째 회사를 제 발로 박차고 나왔지만,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디 꿈 찾는 게 쉬운 일인가. 다시 한번 나는 꿈을 향해 전력 질주하지 않고 빙~ 돌아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곳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내 마음을 좇는 대신 안정감을 택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이십 대 후반의 미혼 여자가 품위 유지하며 살기에 적당한 돈, 큰 사고 치지 않으면 웬만하면 정년 보장되는 분위기 – 이 모든 것들을 사람들은 안정감이라 불렀다 – 속에서 안정감과 마음의 여유를 느껴야 하지만 어쩐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곳.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 이런 아이러니가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 머릿속에는 “새장 속에 갇힌 새”와 어릴 때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에 나오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구절만 빙글빙글 돌뿐이었다
어느 날,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같은 고등학교 동창인, 그래서 나도 아는 내 친구의 친구가 이번에 뮤지컬에 출연하는데 배우 할인으로 저렴하게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니지는 않았지만 공연이라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공연이 열리는 곳도 마침 회사와 가까웠다. 공연을 보는 날 만큼은 야근을 하지 않으리라, 기를 쓰고 칼퇴를 하고자 했지만 이날도 결국 공연이 시작하고 나서야 겨우 들어가서 볼 수 있었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감이 꽤 있는 극장이었기에, VIP석이어도 무대나 배우들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내 눈과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배우를 발견했다. 깊고 어두운 대극장을 가득 채우는 힘 있는 목소리와 관객을 압도하는 그만이 가진 분위기. 나는 그 배우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에 속절없이 끌려들어 갔다. 무대가 막을 내리고 나서도 여운은 지속되었다. ‘이 극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 같은 저 느낌은 어떻게 나는 거지?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의 존재감을 무대에서 확실히 드러내는 사람, 그 모습이 정말 멋있었고 또 부러웠다. 그렇게 시작한 뮤지컬 앓이 덕분에 나는 꽤나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다. 유명하다는 뮤지컬도 보고, 대학로 소극장에 올려지는 창작 뮤지컬도 봤다. 대극장 뮤지컬은 웅장함과 화려함이 있었고, 유명 고전이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게 많아서 스토리라인이 탄탄했다. 원작과 비교해서 관람하는 재미도 쏠쏠했으며, 검증된 배우들이 주로 연기했기에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퀄리티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소극장 뮤지컬은 배우들과 같이 호흡하며 극 속에 녹아드는 재미가 있었다. 조금 더 마이너 한 스토리를 다루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중적이지는 않아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나, 처음 접하는 내용을 가진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아기자기하지만 밀도 높은 소극장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나’라는 사람을 짊어지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마음은 얽히고설켜 커다란 덩어리로 부풀어 있었다. 정체 모를 꿈을 향한 하릴없는 기대와 갈망,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뒤엉켜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유의미한 가닥을 뽑아내지 못했다. 내 마음은 너무 깊고 어두워서 나조차도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는 공연장의 암막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환한 조명 아래 빛나는 사람들을 보며, 웃고 울고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는 생의 희로애락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저토록 살아있는 게 바로 인생이겠지? 나는 관객석에 앉아 인생을 관망했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로 뛰어들 용기가 없었기에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무대의 커튼이 내려가고 조명이 꺼지면 잠깐 켜져 있던 내 마음속 빛도 덩달아 꺼졌다. 밝고 환한 가상의 세계에서 갑자기 차디찬 현실의 벽이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딸깍딸깍 내 마음속 빛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뮤덕: 뮤지컬 관람에 큰 관심을 가진 덕후들, 뮤지컬 덕후의 줄임말 (나무위키 설명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