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품 인생

by 수인

“머리가 빨리빨리 안 돌아가요?”


건너편 방에 있던 그가 저벅저벅 내 자리로 걸어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불쾌감이 고개를 들던 때 내 모니터를 보며 던진 그 한마디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머리가 안 돌아가냐고요? 아니요, 당신이 좁고 구불구불한 옛날 국도처럼 이리저리 꼬아서 지시를 내린 탓에 그 얽히고설킨 걸 푸느라 제 머리가 그 언제보다도 팽팽 돌아가고 있는데요?’ 나는 올라오는 이 말을 꾹 눌렀다. 아니,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이 말은 내가 누르기도 전에 알아서 내려가 버렸다. 그게 내가 속한 이 회사의 문화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변호사에게는 감히 하지 않는 것, 변호사의 지시라면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해야 하는 것. 그런 회사에서 어언 2년 정도를 보냈으니 튀어나오려는 말이 저절로 삼켜지는 것도 당연했다.




내 두 번째 회사인 로펌, 이곳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를 기억한다. 건너편에는 지긋한 연배의 이사님을 비롯한 면접관 분들이 자리하고 계셨고, 내게 몇 가지 질문을 건네셨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중 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변호사 및 비서 분들과 협력해서 일을 잘 도모하고 싶습니다!” 몹시도 정석적인 이 답변이 이사님의 마음에 들었던 걸까, 며칠 지나지 않아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정석적인 답변이 정석대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입사한 지 3개월이 채 안 되었을 무렵부터 ‘퇴사’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00 씨, 변호사님께 메일 드리기 전에 나 한 번 보여줘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다소 당황했지만 상사의 말씀이니 일단 보여드렸다.


“이건 이렇게 고치고, 쿠션 언어를 앞에 붙여야 하고, 조금 더 공손하게 써볼래요?”


공손하게. 공손하게. 나는 중고등, 대학교를 무탈하게 마친 사람이고 이전에 회사를 다닌 경험도 있다. 그전 회사는 서비스업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곳보다도 고급 예절 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직한 곳에서 갑자기 빨간펜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게 아니라 더 공손하게 쓰라는 지적이라니. 그 공손한 말투라 함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변호사님, 바쁘신 중 ‘정말’ 죄송하오나 제가 ~~ 했사오니 ~~ 하시겠습니다만, 편하실 때 살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문장이란 말인가. 궁중에서 쓰는 언어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이 시대에도 왕정이 존재한다면 이런 말투를 쓰지 않을까 싶은 언어에 적잖은 문화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의 충격과는 상관없이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혼자 변호사에게 메일을 보낼 수 있을 때까지 상사에게 이메일 검토를 받았다.


이건 하나의 예시일 뿐, 회사 전체에 이런 문화가 팽배해 있었다. 회사의 메인 스트림인 변호사와 그렇지 않은 비서, 스태프 간의 이분법적이고 수직적인 구조. 아무리 법률회사라고 해도 솔직히 말하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지점이었다. 나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곧잘 감정 쓰레기통도 되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변호사 한 사람은 사무실 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다른 변호사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실수를 하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전체 메일로 답장을 보내며 “누가 이 사람에게 이 건에 대해 설명 좀 해주세요.”라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다. 사실 예의 있게 행동하는 변호사들도 있었고, 대다수는 오히려 이리저리 빙~돌려 말하고 컨택하는 문화를 불편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시니어 스태프들은 필요 이상으로 변호사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듯한 태도와 매너를 강조했다. 일부 시니어 변호사들과 스태프들로부터 만들어진 이런 문화가 아직도 답습되는 듯이 보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우리끼리 하는 말이 있었다. 이곳은 인도 카스트 제도 같은 게 있는 곳이라고.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그리고 불가촉천민까지. 나를 비롯한 비서와 스태프들은 종종 이런 자조 섞인 말을 하며 우리가 사회와 조직에게 품는 불만을 농담 같지 않은 농담으로 넘겨버리려 애썼다.


사실 이곳만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구분 짓기 – 생각해 보면 첫 번째 직장인 백화점에서도 대졸 공채와 비 대졸 공채 간에 보이지 않는 묘한 편 가르기와 기싸움이 있었다. 팀 내 유일한 대졸 공채 출신 여직원이었던 나는 그 중간에서 항상 어쩔 줄 몰라했다. (남자 대졸 공채 직원들과 여자 비 대졸 공채 직원들이 점심시간만 되면 서로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바람에 종종 난감했다.) 나는 이 비유 외에도 혼자 생각하곤 했던 비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라 골품제도였다. 성골, 진골, 그리고 여섯 등급의 ‘두품’과 평민으로 이루어진 신분제도. 아무리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도 결코 그 어떤 인정이나 대우도 못 받고 올라갈 수 있는 직급에도 한계가 있는, 철저히 이원화된 사회 구조. 역사 시간에서만 보던 그런 신분제도를 21세기 현대사회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하게 될 줄이야.




학창 시절에 나는 모범생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나는 반에서는 항상 1등이었고, 전교에서도 언제나 상위권에 있었다. 학생들의 선호도보다는 학교 성적과 선생님의 신임(?)에 의해 학급 및 학교의 임원이 결정되는 분위기에 따라 반장과 부반장을 도맡아 했고, 중고등학교 내내 학생회 임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또 어쩌면 부자연스럽게 ‘나=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그리고 학교라는 시스템에 편입된 그 순간부터 이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매달렸다. 중고등학교 때 내 행동반경이란 집 – 학교 – 독서실이 전부였고, 친구들과 그 흔한 떡볶이를 먹으며 담소를 나눈 일도 손에 꼽는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달리는 건 미래의 내 행복을 위해서라고,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공부한다고. 미래에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히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닿으려면 멀어지고, 또 잡으려면 도망가는 미래의 행복을 좇다가 정신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국내에서 알아주는 로펌에 입사해 있었다. 겉으로는 좋은 회사 다니는 괜찮은 이십 대 후반 여성으로 보였겠지만 내 속은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수직적이고 이분법적인 회사 분위기는 차치하고서라도 4년제 대학교, 그중에서도 내로라하는 대학교를 나온 내가 고등교육으로 쌓은 지식을 전혀 활용할 수 없는 단순한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구나 3개월 정도만 훈련을 받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내가 어느 날 사라져도 누군가가 가뿐히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잘 돌아가는 기계 속 하나의 부품에 불과했다. 고장 나면 갈아 끼우면 그만인, 그저 그런 부품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래도 돈 받은 만큼은 일하자는 괜한 책임감에 일주일에 3-4일은 꼬박 야근했지만 내 이름으로 돌아오는 경력한 줄 얻을 수 없었다. 내가 찾고 기록하고 관리한 자료는 변호사들이 준비하는 자료의 기초가 되었는데, 아무도 그 노고와 성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열심히 길어다 나르는 느낌이었다. 채워도 채워도 얻는 것 하나 없는 건 내 경력과 마음이었다. 지금껏 내가 한 만큼 성과를 내고 인정받으며 살아왔는데 여기서는 일은 일대로 해도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육두품에 불과했다. 능력과 재능이 있으나 신분의 한계에 가로막혀 일정 관직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비운의 육두품. 그게 바로 나였다.

행복을 미루고 타인과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성을 다한 삶의 종착지가 신분제 사회에 가로막혀 있는 육두품 신세라니. 나는 자존심이 상했고 불행했으며,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끝을 알 수 없어서 더 깊고 어두운 흔들림 속으로 끝도 없이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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