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해방감에 대하여
8년 전 가을, 네이버에서 우연히 대림미술관 전시광고를 보고 라이언 맥긴리를 알았다. 광고 속 그의 사진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동그란 엉덩이가 다 드러난 새하얀 알몸으로 미서부의 사막을 뛰어다니는 이삼십 대 남녀들이 있었다. 광고를 보고 한눈에 반해 대림미술관에 갔다. 누군가 찍은 사진에 그토록 끌렸던 것도, 혼자서 미술관에 간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진전의 컨셉은 '청춘'이었다. 나는 사실 청춘이란 주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뻔하잖아. 울건 웃건 화를 내건 존재 자체가 청춘인 젊고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이 사진속에 한가득인걸. 또 한편으로,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을 말하기에는 청춘이라는 프레임이 너무 작은 것 같았다. 비록 연출일지언정 불꽃속으로, 바닷속으로, 산속으로, 허공으로 과감하게 뛰어드는 짐승같은 그들의 모습으로부터 청춘이라는 단어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원초적인 생명력을 느꼈기에. 청춘 보다는 원시력. 태초의 인간. 그런 말이 좀 더 적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튼 알고 있었지만 그날 새삼 한번 더 느꼈더랬지, 사람도 결국 먹고 자고 종족 번식하면서 본능에 순응해 살아가는 동물임을. 라이언 맥긴리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사람과 동물모델들이 나란히 담긴 사진 섹션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 사진들 속에서는 다들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사람도 공작새도 토끼도 공평하게 전부 알몸. 라이언 맥긴리가 내 삶의 깃발이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사진들은 내가 좀 모자라면 어때. 니가 알몸이면 뭐 어때. 우리는 결국 동물이야. 근데 뭐, 어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문득 알았다. 이전에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그건 바로, 내가 꽤 오랫동안 나 스스로를 인정해주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키우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엄마는 항상 바빴다. 그리고 신경질적이었다. 풍부한 감수성을 갖고 태어난 나는 정서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했지만, 어린 내가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심해서 스스로 손을 뻗어 도움을 구할 만큼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난 늘 내가 만든 비좁은 마음의 공간에 나를 가두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꽉 닫은 채 그저 이 우울한 인생이 빨리 끝나거나 혹은 갑작스레 나도 모르는 엄청난 행운이 찾아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완전히 바뀌기를 바라며 길고 지루한 시간들을 버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때 엄마는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예술계통이나 심리학이 아닌 상경계열을 전공해 졸업 후 바로 대기업에 취직을 하기를 바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경계열을 전공한다고 대기업에 바로 취직되는 것도 아니었고, 엄마는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때 나의 다짐이 절실했다면, 그때 엄마가 등록금을 안내줬다면 내가 어떻게든 벌었을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엄마의 의견에 끌려가기를 택했다. 그래. 그냥 될대로 되라. 그런 무책임한 마음으로.
그러다 대학교 때 제대로 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음악이었다. 근데 막상, 정말 하고 싶었던 건데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음악 동아리에 나가고, 방학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화성학도 배우고 커뮤니티 강좌를 보면서 미디 음악을 공부하는 등 나름의 노력은 했다. 하지만 음악이론은 배울수록 어렵고 귀찮았다. 미디 프로그램은 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나는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대부분의 일들에 자신이 없었고,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지니 마음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있었다. (당시 만들었던 몇 곡 안 되는 노래들을 세상에 내놓은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다.) 그랬던 내가 냉정한 취업시장에서 살아남을리가... 이래저래 시도한 끝에 운 좋게 큰 기관에서 인턴쉽을 하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해본 사회생활은 쉽지 않았으며 늘 내적 갈등의 연속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이년을 그렇게 방황했다. 라이언 맥긴리전에 간 게 딱 그때였다. 삶은 지금도 앞으로도 전혀 내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는 무력감과 패배의식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길고 지루한 인생의 클라이막스만을 무력하게 기다리고 있을 무렵.
그 뒤로 라이언 맥긴리 개인전에 두번을 더 갔다. 세번째 관람을 끝내고 미술관에서 나온 뒤,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마음대로 살자.
나는 상상 속에서 라이언 맥긴리의 모델이 되었다. 사진 속 모델들처럼 알몸으로 사막을 질주하거나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상상속에서는 이미 백번도 넘게 그렇게 했더랬지. 그동안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며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으리라고 체념해왔던 나의 부끄러운 자아, 그 껍질을 쭉 찢어 탈피하고 나는 새롭게 태어났다.
그때부터 혼자 전시를 다녔다. 처음에는 사진전만 찾아다니다가 회화전을 보기 시작하면서 미술관에 가는 것이 진정한 취미생활로 자리잡았다. 특별히 회사 일이 바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날들을 제외하고는 주말의 거의 대부분을 미술관에서 보냈다. 예술가들의 시각언어에 둘러싸여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여러 작품을 통해 위로받았고 해방감을 느꼈다. 가끔 눈살이 찌푸려지는 작품을 보기도 했고, 소름 끼칠 정도로 좋은 인생 작품을 발견하기도 하며 차츰 취향도 찾아갔다.
미술관에 가는 건 매번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이다. 그게 무엇이건 어디에 있건 오감을 곤두세우고 열심히 더듬거리다 보면 진귀한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유는 앞서 몸소 그것을 경험해봤으니까. 그동안 누구도 알려줄 수 없었던 해방감을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을 통해 느꼈고, 그날의 체험이 현재 내 자아의 일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천천히 하지만 눈에 띄게 달라졌고 그 결과, 지금의 나는 꽤 적극적인 자세로 내 삶을 열심히 즐기고 있다.
부족한 나지만 앞으로는 내가 보고 듣고 좋았던 것들을 글로 적어서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싶다. 누구나 각자에게 꼭 필요한 깃발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본인이 직접 찾아야만 한다. 비록 내가 그것을 대신 찾아주지는 못하더라도 깃발이라는 게 있다는 걸 넌지시 알려줄 수 있는 지나가는 사람 1 정도는 되고 싶다. 그래서 이런 걸 쓴다.
나는 내일의 우리 마음이 오늘보다 조금만 맑아도 좋겠다. 그러니 자유의 상징같은 깃발을 손에 쥐고서 비가 오건 눈이 오건 해가 정수리로 쫙쫙 내리 꽂히는 따갑게 더운 날이건 힘차게 흔들자. 궂은 날에도 깃발을 손에서 놓지 않는 마음의 힘을 기르자. 라이언 맥긴리가 2018년에 자기 홈페이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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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have an idea we might know what we look like, and yet it remains a difficult thing truly to apprehend.
우리는 우리가 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있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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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는 죽을 때까지 나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뭐 어때. 죽을 때까지 손에 깃발을 쥘 힘만 남아있으면 돼. 그럼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라이언 맥긴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