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워야단은 고래인 것 같다. 리워야단은 악어나 상징적인 동물이 아니라, 실재(진짜로 있는)하는 고래를 말하는 듯하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내가 2010년에 처음 읽었다. 전문 번역가 김석희 씨가 번역을 한 책이라서 구매해서 읽었던 것을, 다시 읽으면서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불경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성경을 내 삶 속에서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성경을 삶 속에서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는 말은 내가 경험한 경험들을 통해서(학문적인 접근과 지적인 접근을 포함하는) 만들어진 선입견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말과 같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 말하면, 여기부터 정말 불경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고 내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성경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볼 수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도 처음부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모든 경험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지적인 경험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지적인 탐험은 성경에 새로운 의심을 생겨나게 하지만, 그 의심은 다시 더 큰 믿음을 이끄는 데에 사용된다. 예를 들어, 어떤 텍스트를 읽었는데, 그 텍스트는 내가 가진 믿음에 충격을 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게 충격을 가한 텍스트를 꼼꼼하게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의심의 과정 안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균열이 잠시 생기기도 하지만 성경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으로 이용한다. (근육 운동을 할 때 근육이 생성되는 원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것도 아니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신앙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성경은 나에게 어떤 다른 텍스트와 다른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똑같이 한국어 활자로 된), 다른 이야기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의심을 품는 것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회의懷疑(의심을 품는 것)는 내가 철학과를 다니면서 정교하게 익힌 부분이고, 나는 내가 익힌 기술이 점점 더 정교하고 세련되기를 노력한다.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감정들, 예를 들어, 고독 사랑 질투 미움 시기 허무 등과 같은 감정들처럼, 텍스트에 대한 의심은 나에게는 근원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텍스트를 텍스트에 근거하지 않는 외적인 것으로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 1』에는 2008년에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에 읽었던 책인데,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엘리아데는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는 일이 과장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200~300명 정도 탈출했던 기록이 시간이 지나면서 달리 기술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내 생각에 엘리아데는 기록된 숫자도 상징으로 이해한 것이 아닌가 싶다.)
철학적 해석학에 근거하여, 나는 민수기에 기록된 부분을 근거로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관련된 책들을 보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나는 엘리아데의 입장보다는 성경에 기록된 텍스트가 더 설득력 있다고 믿는다.
리워야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서두가 길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리워야단에 대해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리워야단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이 아니라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처음 봤다. 이 책에서는 리워야단(리바이어던)을 괴물로 묘사하는데, 그가 묘사하는 괴물은 욥기와 이사야서와 시편에 등장한다. 성경에는 리워야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고대 근동에서 리워야단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공부가 더 필요한 것 같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이사야 27:1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시편 74:14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시편 104:26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욥기 41:1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욥기 3:8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정말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리워야단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상징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거대하고 광포한 어떤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이미지가 상징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다시 말하면 리워야단은 상상 속의 동물인 동시에 허구이고, 허구가 만들어내는 공포감은 실제가 만들어내는 공포감과 버금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용도로 리워야단이 사용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이해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방향으로 인식을 이끄는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이다. 왜냐하면 철학적 해석학에 근거하여 텍스트는 전체에서 부분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부분에서 전체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리워야단이 어떤 상징적인 존재로 드러나기 전에, 상징적인 존재가 상상에 근거하게 된다면, 성경이라는 텍스트 전체에 위협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리워야단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것처럼, 성경의 다른 부분도 상상 속으로 그려냈을 거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 이미지가 상징을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때로는 상징보다는 이미지가 더 큰 의미를 갖기도 한다. 나는 이점에 주목하고 싶다.
성경을 온전한 기록이라고 믿기 위해서는, 리워야단은 실재(진짜로 있는)하는 동물이어야 하고, 그 동물에 대한 관념이 더해져서 기록으로 등장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리워야단은 정말 무엇일까?
성경에 관련된 주석을 살펴보면, 리워야단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바다에 사는 동물은 분명한데, 악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형체를 묘사할 때에는 바다 괴물처럼 그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설득되는 부분이 적다. 왜냐하면 악어는 너무 작은 데다가 실재하지 않는 동물을 실재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상상이나 관념에 의존하면 리워야단이라고 지칭되는 어떤 대상이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모비 딕』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소설은 1851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아래는 리디북스에서 제공하는 강수정 옮김, 『모비 딕』에서 인용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전자책이어서 옮겨 붙이기가 편했다.)
그래도 해안에 떠밀려 온 고래의 골격을 보면 진정한 형체의 정확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터다. 어림없는 소리다. 이 바다 괴물의 가장 기묘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골격을 봐도 전체적인 형체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레미 벤덤의 해골은 유언 집행자들의 서재에 촛대처럼 매달려 있지만, 그의 대표적인 신체적 특징과 함께 굵은 눈썹을 가진 공리주의 노신사의 면모를 정확하게 전해 준다. 그러나 바다 괴물의 관절 뼈를 가지고는 결코 이런 식의 추론을 할 수 없다. 실제로 위대한 헌터가 말했듯이, 뼈만 남은 고래와 살을 온전히 입은 고래의 관계란 곤충과 그걸 둥글게 감싼 번데기의 관계에 비교할 수 있다. 나중에 이 책에서 다루겠지만, 이런 특징은 특히 머리에서 현저하게 확인되며 옆 지느러미에서도 상당히 묘하게 드러난다.
이런 이유들을 종합했을 때, 고래를 어떤 식으로 보건 간에 이 커다란 바다 괴물(리바이어던)은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그릴 수 없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어떤 그림은 다른 그림에 비해 실체에 훨씬 근접할지도 모르지만, 상당한 수준의 정확성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림은 하나도 없다. (김석희 역에는 바다 괴물을 리바이어던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고래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알아낼 세속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 있는 고래의 윤곽을 웬만큼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포경선을 타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녀석의 공격으로 구멍이 뚫려 영원히 물에 잠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이 바다 괴물에 대해서는 지나친 호기심을 고집하지 않는 게 제일 좋을 듯하다.
실제로 고래를 접한 사람은 거의 없고, 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쉽지 않다. 고래에 대해서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 현대인이라고 할지라도 고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가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볼 수 있는 고래는 실제의 모습을 담아 화면으로 보는 것뿐이다. 나는 실제로 고래를 본 적도 없어서 고래의 이미지가 무엇을 전달하는지 체감하기 어렵다. 『로마인 이야기 2』와 『로마제국 쇠망사』에 등장하는 코끼리가 전투용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코끼리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면서 동물원에 다시 가게 되었는데, 코끼리의 크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동물원에 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실제로 보니 정말 전쟁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겠구나라고 느끼게 되었다. 고래를 직접 본다면 정말 다르지 않을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리워야단이 실재하는 동물을 지칭하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니?"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냥 리워야단은 리워야단인 거고, 그게 실재하던 실재하지 않던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힘을 상징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는 거야."
나에게 중요한 것은 실재이다. 진짜로 있는 것이 나에게 가장 큰 의미를 준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고, 없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도 맞지 않다. "모비 딕"은 뛰어난 지능을 가진, 인간의 힘과 능력과 계략을 뛰어넘는다. 허먼 멜빌에 의하면, 고래의 힘과 크기는 가늠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포경선을 탈 수밖에 없지만, 포경선을 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고래는 그 어떤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크기와 힘을 가진 바다 괴물임이 분명하다.
나는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 때문에 나의 믿음은 더 커진다. 리워야단이 고래라고 확신이 되었을 때에, 나에게 성경의 이야기는 더 진실한 것으로 다가온다.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나는 그런 이해의 과정을 매우 흡족한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나의 지적인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글을 쓰고 나니,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다시 읽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