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꼭 살아보고 싶은 남자를 만나 2년 열심히 연애를 했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가장 소중한 것은 서로였을 뿐, 우리 사이엔 그 누구도 없었다.
5년쯤 살 작정을 하고 그와 결혼을 했다.
(왜 5년이냐 하면 우리는 성격이나 취향 모든 것이 달랐기 때문에 그 이상 살 자신은 없었다.
정리 정돈은 영 자신 없는 나와 깔끔 그 자체인 남편과 얼마나 서로를 견딜지...)
합법적인 결혼의 시작은 입덧이었다.
밥 냄새를 맡으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남편이 옆에 있었다.
10시간 이상 잔 뒤였다. 큰아들은 그렇게 잠이 많았다.
아들이 태어났다.
샛별이란 이름까지 지어놓고 애타게 딸을 기다렸는데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10개월이 되자 걷기 시작했다.
돌 때는 보따리를 들고 다다다 뛰었다.
음악이 흥겨우면 춤도 추고 잘 놀고 잘 먹는 순한 아이였다.
결혼 5년째 되던 해, 남편 친구 부부와 강원도로 여름 여행을 갔다.
시집살이에 지친 나와 그런 나를 불만스럽게 보던 남편.
우리들은 그곳에서 폭발했다.
남들 앞에서 부끄럽게 싸운 뒤, 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콘도 앞은 늦은 밤이었는데도 차가 씽씽 다니고 있었다.
세상에 나만 홀로 버려진 듯 외롭고 쓸쓸했다.
“해준아, 엄마 너무 속상해서 못 살겠다.
엄마 그만 죽고 싶다.
저기 차 앞으로 그만 뛰어들까?”
철없는 엄마의 독백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듣던 아이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엄마 안 돼, 엄마. 이제부턴 나 보고 살아.
아빠 보고 살지 말고, 나 보고 살아.”
4살밖에 안 된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정신이 번쩍 났다.
5년만 살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겐 책임져야 할 아이가 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래, 엄마는 이제 강하게 산다.
너의 엄마로, 너를 위해 살겠다.
아이가 나를 진정한 엄마로 다시 만들어 주었다.
3년 전, 큰아들은 동성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먹고사느라 바빠 제대로 된 학원 한 번 못 보내고
어린 동생 돌보기까지 시켰는데, 아이는 엄마를 한없이 기쁘게 해주었다.
입학식 날,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신입생을 대표해
입학 선서를 하는 아들을 보며 몇 달 전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
살아계셨으면 누구보다 더 기뻐하셨을 텐데...
중학교 3년 내내 아들은 착하게 자라주었다.
가끔 반항을 하기도 하고 동생과 싸우기도 했지만
나의 기쁨이자 자랑이었다.
얼마 전, 아들은 한성과학고를 지원했다.
5.85대 1의 경쟁률을 보여 기대도 하지 않았다.
강남의 학원을 보낸 것도, 열심히 뒷바라지를 한 것도
아니었기에 합격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합격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과학고 입학이 어려웠다는데...
고맙고 또 고마웠다.
이제 내 아들의 앞길엔 더 많은 책임과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선행 학습을 많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좌절도 맛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무너지려던 엄마를 꼭 잡아준 아들의 힘을...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내 아이는 이겨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 혼자 힘으로 세상을 멋지게 살아갈 것이다.
못난 엄마는 과거에도 해준 것이 없고
앞으로도 해줄 것이 없지만, 간절한 마음의 기도만은 한결같을 것이다.
하나님,
내 아이를 지켜 주소서.
저의 기쁨이고
삶의 이유였던 아이가
세상의 기쁨이며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지켜주소서.
먼 훗날, 엄마가 얼마나 큰 힘을 아들로 인해 얻었는지
그 아이는 알 수 있을까?
바라기는, 세상에 큰 힘이 되는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이 밤, 엄마는 빌고 또 빈다.
2004년 12월 12일
송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