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번을 또 해냈으니 ~할 날은 올 것이다
"오셨어요."
"어, 신우야. 저번엔 미안했어. 혼자 있어?"
"얘들 밥 먹으러 갔다가 온대요."
며칠 만에 다시 당구장에 들렀다. 신우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친구 3인방이 들어왔다.
ROUND 1: 초대 래퍼 [종신]
"안녕하세요! 저번에 삼겹살 맛있게 드셨어요? 형님 덕분에 그날 환상적이었잖아요. 얼마나 고마웠던지."
종신이가 대뜸 나에게 비꼬듯이 말을 이어갔다.
"원강아, 그렇지? 무슨 삼겹살에 초대니 뭐니, 웃기지도 않아서. 아, 그건 그렇고 형도 알죠? 예전에 형 당구 개박살 났을 때, 같이 쳤던 미용실 사장님이랑 이따가 당구 치기로 했는데, 형도 칠래요? 하긴 그렇게 박살 나고 어떻게 칠까 싶긴 하지만, 전 형을 당구에 초대할 테니, 칠 거면 껴도 돼요."
일전에 내 말에 기분이 나빴었나 보다. 선을 넘으려는 모습에 나는 종신이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래퍼야?"
신우와 한 게임 치려고 호식이가 공을 가져와 당구 테이블로 오며 종신이에게 말했다.
"야 신우 형이랑 당구칠 건데, 좀 그만 말하고 비켜줄래?"
ROUND 2: 대변 래퍼 [원강]
그때, 원강이가 한 마디 보탰다.
"도중이 형, 그날 종신이 밤새 1억 다 잃고, 자기 돈도 600 정도 잃었어요."
"흐~음 (어이없어 하며) 그런데?"
"형, 1억이었다고요. 그런데가 뭐예요? 그날 밥 먹으러 같이 가서 술 한 잔 했으면 그런 일 없었어요. 종신이는 술 한 잔 먹어도 베팅 안 하는 거 모르세요?"
아무 말 없던 신우가 원강이의 말에 한마디 한다.
"원강아! 그만해!"
"아니야, 괜찮아 신우야. 더 할 말은? 더 하려면 해."
"그렇다고요. 종신이 많이 힘들었었어요."
ROUND 3: 지원 래퍼 [미용실 사장]
이제 상황이 이해됐다. 종신이는 돈 잃은 걸 내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감정이 치솟았지만 어이없는 이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미용실 사장이 들어왔다. 환하게 웃으며 동생들에게 인사한다.
"오호, 호식이! 진짜 오랜만이네?"
"네. 아, 신우형 나 갑자기 배에 똥 찬 것 같아. 화장실 금방 다녀올게요."
호식이 반응에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하는데 화풀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구 끊었다더니, 다시 치는 거야? 당구장 빚은 잘 갚았고? 엄청 유리멘탈이였던 거는 인상 깊어서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이건 또 뭔 상황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난데없이 공격이 들어왔다.
"저 아세요? 왜 반말이세요?"
"허허. 사람을 잘 못 봤나. 얼굴은 봤던 사람인데 성질은 처음 보는 사람이네. 걘 엄청 순해서 가져 놀기 좋았는데. 아닌가 보네."
ROUND 4: 반격 래퍼 [도중]
미용실 사장 덕분에 할 말이 정리됐다.
"종신아, 아까 말한 분이 이분이었어. 그런데 넌 래퍼들을 모으나봐. 팀 짜서 오디션 나가려고? 예전처럼 팀으로 짜고 치면 우승할 것 같은데. 요즘 상금 크잖아. 얼마전 날렸다는 1억 때문에 미쳐가는 거 같은데 우승해서 잃은 돈 다시 찾아봐. 원강아, 넌 호식이에 한참 못 미치지만 그래도 노래 좀 하잖아. 네가 메인 보컬하면 되겠네. 노래할 때 감정 조절은 연습 많이 하고. 아, 그런데 너한테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미용실 사장이라는 이름은 너무 올드해 보이잖아. 깍새로 개명좀 하면 좋을 듯. 종신아, 아까 너랑 깎새가 조잘조잘 랩하는거 배워봤는데. 어때? 형 스카우트할 만해? 너 아까 나 초대한다고 했는데 어쩌냐. 난 널 초대도 안하고, 네가 스카우트해도 안 가. 팀명은 추천해 줄게. 꼴값들 어때?"
빠르게 말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원강이가 감정이 터졌다.
"도중이 형, 같이 저녁만 먹었어도 안 일어날 일이었잖아. 그래 놓고 지금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는 신우에게 눈짓으로 '내가 해결할게'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 종신이와 원강이에게 말했다.
"내가 너네 돈까지 신경 써야 해? 그건 니들이 알아서 해. 도박으로 딴 1억으로 똥물 튀기고 지랄이야. 냄새 역겨우니까 그만 튀겨."
ROUND 5: 꼴값들의 비아냥
원강이 기분이 안 풀리는지 계속하려는데 종신이 말한다.
"후~우. 원강아, 사장님도 오셔서 당구 쳐야 하니까 일단 그만하자. 도중이 형은 당연히 쫄리니 안 칠 거고."
호식이, 신우, 종신, 미용실 사장은 예전보다 더 큰 판돈의 당구를 시작했다. 미용실 사장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한 마디 한다.
"이야, 오늘 당구는 살벌하겠구먼. 허허."
미용실 사장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큐로 머리를 찍고 싶었다.
당구가 시작되었고, 나는 원강이와 대화를 하였다. 그도 좀 진정이 되었고, 나는 잠시 당구를 구경하는데 놀랐다. 모두가 무섭게 친다. 호식이는 꼭 이 날을 위해 이를 갈고 당구 실력을 키워왔던 것 같다. 신우도 예전과 다르다. 계속 쭉 쳐왔던 것 같다. 개버릇 못 준다고 종신이는 또 공의 초이스를 바꾼다. 예전 당구장 사장과 짜고 칠 때의 모습이다. 그런데 호식이가 그걸 보고 씩 웃는다. 이제 이 정도 조작은 판을 바꿀 정도가 아니었다. 저 네 명 중에 흔들리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조금 더 구경하다가 난 나갈 준비를 했다.
ROUND 7: 꼴값들의 거만
내 이름이 불리는 걸 듣고 미용실 사장이 말했다.
"아 맞다. 도중이었지. 왜 같이 치지? 벌써 가려고? 당구 실력 그런데로 봐줄만 했던 거 같은데. 유리멘탈이라 그랬지. 그런데 오늘 보니까 조금 강화된 것 같기는 한네, 그래봐야 유리일 것 같으니까 너가 치면 1점당 칩 두 개씩 줄게."
종신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이 말을 이어받는다.
"형, 당구 오래 쉬었다고 하니 전 3개씩 줄게요. 콜?"
난 일어나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벽면에 기대어 세워진 큐를 잡았다.
"10개씩 주면 콜. 둘 다 좀 더 써봐. 자신 없나?"
미용실 사장이 더이상 나를 상대하기 싫은 듯 말한다.
"미쳤네. 됐으니까 가려면 얼른 가라."
ROUND 8: 토스 [도중] 백어택 [호식]
큐를 잘 끼워놓고 미용실 사장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아니,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데 아직도 그때와 똑같은 조작을 하나? 머리가 나쁜건가? 이 팀이 그래도 유지되는 거 보면 대단하다. 무슨 짜고 치면서까지 얘들 돈 따먹으려고 하고. 그리고 이봐요. 나이 좀 처먹었으면 더 높은 데서 놀아요. OOO 이런 분 들하고 당구 칠 사이즈는 아닌가? 하긴, 그 분 치는 거 예전에 한 번 보기는 했는데, 당구 못 치는 내가 봐도 당신과 차이가 심하게 나는 것 같기는 하다."
예전에 들었던 전국구 작대기의 이름을 말하며 말싸움을 이어갔다.
'뭐야? 당구장 사장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전국구라는 분한테 털린 적이 있나?'
호식이가 나이스 타이밍에 말을 이어받았다. 백어택 강 스파이크다.
"사장님! 노인정 당구 치세요? 귀도 자셨나? 도대체 몇 번 말해야 하는거야. 전 여기까지 칠게요. 졸려도 너무 졸려."
호식이는 큐를 정리하고 판을 나왔다. 이렇게 당구장 말싸움을 끝냈다.
우린 이제 안다. 꼴값들하고는 판을 같이 안 하면 된다는 것을. 같은 판에 놀 필요가 없다는 것을. 행여나 같이 놀 수밖에 없을 땐 맞서야 한다는 것을. 꼴값들의 작은 몸짓에 자칫하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이 용기를 내기까지 오래 걸렸다.
"신우야, 호식아, 나 간다."
"네, 들어가세요."
차를 탔는데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무엇인가에 맞서는 것이 아직도 너무 어렵다. 내 감정을 표출하지 못한 채, 당하고 끌려가는 것만 같은 인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그러나 안 하면 다음에 더 못한다. 이 한 번을 또 해냈으니 익숙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포기하지 말자. 이런 일 있으면 하루종일 몇날몇일 감정이 남아있었는데, 감정의 회복이 빨라지고 있다.
오늘 당구장 간 목적은 신우의 카지노 사이트 아이디를 물어보러 간 것이었다. 이제 사이트에 추천인 아이디만 적으면 가입을 할 수 있는데 머리가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