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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Oct 20. 2024

16화 지안

지구가 눈을 뜨다

지안


OOOO 년 OO월 OO일


올챙이의 꼬리가 없다고 개구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혼 초, 아내는 나이트 근무 중 계단에서 넘어져 하혈을 하고 아이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이 깊은 상처로 남았었다. 그 후로 아내는 전보다 더 간절히 아이를 원했지만, 하늘은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둘 다 병원 검사를 받았는데 그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개구리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정자들이 꼬리가 없는 건 처음 봤다. 그나마 형체를 갖춘 것들도 힘없이 비실비실대고 있다. 개체 수는 정상인의 수치보다 현저히 적었고 움직임도 둔했다. 그 화면을 보고 있는데 그 당시 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력도 없는 나는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지냈다. 개구리가 된 줄 착각했지만 사실 꼬리 없는 올챙이일 뿐이었다. 올챙이의 조건도 못 갖춘 놈이 착각 속에 살던 것이 후회가 됐다. 결혼 전, 수년간 당구장에서 하루 2~3갑씩 피우던 담배와 불규칙한 식습관, 수면 부족이 가져온 결과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병원에서 봤던 꼬리 없는 올챙이들은 세상을 헤엄치지 못하는 나와 같아 보였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그러나 때는 포기하지 않을 때 또 만들 수 있다.


나는 거의 포기 상태였지만, 아내는 희망을 절대 놓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자극받아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며 금연하고 건강을 챙기려 애썼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었다. 결혼 초기 기적처럼 임신했을 때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것이 너무 미안했다. 아내가 검사를 한 번 더 해보자고 할 때마다, 결과가 좋아지지 않아서 그녀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줄까 봐 두려워 망설였다. 결국 포기하지 않는 아내의 간절한 눈빛에 이끌려 고집을 꺾고 다시 검사를 받으러 갔다.


머뭇거릴 새가 어디 있나 다음 수를 둬라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데 조마조마했다. 비록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정이 가능한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말을 듣고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겨우 자연임신이 될 정도이지 정상보다 한참 부족했는데 아내는 마치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뻐했다. 그러나 아이는 하늘이 주는 것이 맞다. 신혼 때처럼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올 수 있고, 이렇게 그나마 가능한 상태에서도 오지 않을 수 있다. 아내는 머뭇거리지 않고 발 앞서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0.1%의 가능성이라도 0%가 아니다. 기적은 이 희미한 0.1%가 부른다


수십 번의 시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글들을 보며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첫 번째 시도에서 희미하지만 두 줄이 나타나는 기적이 찾아왔다. 아내는 이 생명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아내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혼 초기 잃었던 아이의 태명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아내는 더욱 자책했다. 시도는 계속되었고 네 번째에 두 줄이 선명하게 나타났을 때, 아내는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고 그 모습은 목숨도 걸 것 같아 보였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힘은 위대하다


아내는 열이 많은 체질로, 한겨울에도 이불을 걷어차고 잘 만큼이었다. 그런데 한 여름밤, 전기장판의 온도를 높이고 이불을 꼭 덮고 무의식마저도 통제하려는 듯 두 손으로 이불을 꽈악 움켜잡았다. 아내가 마음을 먹은 이상 그 무엇으로도 들춰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극심한 감기몸살 고열에 밤새 앓고 있는 듯 보였다.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려 다가가는데, 미세한 나의 움직임마저 허락하지 않는 아내를 보며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만큼은 아이 곁에 그 무엇도 오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 같았다. 세상에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홀로 외롭고 처절하게 싸우며 결국 아내는 이 아이를 지켜냈다. 아내의 모습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아이는 또 얼마나 희망을 놓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하면, 엄마와 아이가 만들어낸 이 기적과도 같은 일은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나는 무엇인가를 지켜내기 위해 이렇게 해 온 적을 생각해 보는데, 이기적인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랬던 기억만이 떠올랐다. 10달 후, 아이도 엄마도 서로의 마음에 보답을 해주며 우리에게 그토록 기다린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기적의 울림소리는 언젠가 울린다


“응애, 응애.”


이 울음소리를 듣기까지 6년이 걸렸다. 모든 것이 감사했다.


푸른 지구가 살아나야 나의 세상도 살아난다. 지구는 삶의 터전이다


아이의 눈을 처음 본 날은 생생하다. 푸른 눈빛이었다. 나는 아내의 맑은 눈에 정화되었고, 아이의 푸른 눈을 통해 세상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눈은 내가 사는 세상, 내가 살아가야 할 땅이었고 푸른 지구였다. 우리는 이 아이의 이름을 지안으로 지었고, 지혜로운 눈, 지구의 눈이라 불렀다. 지안의 눈이 내가 사는 세상의 눈이었고, 중심이었다. 이곳이 나의 삶의 터전이다.


사계절이 흐르고 있다. 상상의 그림에 색을 칠하러 나아간다


우리는 국립공원 휴양지 산 아래의 처가댁으로 이사했다. 좋은 물과 공기 속에서 지안이를 건강하게 키우고 싶었다. 뒤뜰에는 큰 대청마루가 있는데, 한 여름밤 지안이와 누워서 별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고 싶었다. 그 옆 천막 안에는 장작불이 타오르는 아궁이가 있다. 그 안에서 따뜻한 물을 끼얹으며 한 겨울밤 함박눈을 바라보며 물놀이를 하고 싶었다. 마루와 천막 사이에는 닭장과 강아지가 있는데, 지안이와 함께 흙을 밟고 지낼 친구들이다. 그 흙 위로 떨어질 큰 밤나무의 밤송이를 같이 줍고 싶었다. 뒤뜰 끝으로 내려가면 산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물이 흐른다. 봄에 개구리도 보고 물고기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자연 속에서 자라기를 바랐다. 자연이 주는 가르침이 지안이에게 스며들게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결혼을 결정짓게 했던 이유 중 하나인 가족의 화목함 속에서 지안이를 키우고 싶었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게 하고 싶었다. 이 가족과 산과 물과 바람과 별들이 지안이를 따뜻하게 감싸주기를 바랐다. 사실 처가댁을 들어오싫었지만 이 사계절의 그림에 지안이와 색을 칠하고 싶었다. 


가족이란 무언인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못 느껴본 가족의 따뜻함이 있었고, 내가 꿈꾸던 가족의 모습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안의 외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맞벌이하는 우리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나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늘 빈자리처럼 있었다. 아버지의 존재를 조금씩 느껴가는 시점에 장인어른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느낌이 상당히 어색했지만 좋았다. 너무 감사한 이곳에서 어찌 보면 지안이 뿐만 아니라, 나도 성장을 하고 있었다.


산을 따라 맑은 물이 바르게 흐르듯, 지안이의 눈에 흐르는 세상도 맑고 바르게 흐르기를 바란다. 가족의 행복이 이 산에 메아리치듯 가득 퍼지길 바란다. 가족이 모두 건강하길 바란다.


지안이가 잠투정이 한 번 나면 꽤 길어서 잠시 나왔었다. 산책을 하며 이 산과 공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데 이 모든 것이 감사했다. 산 아래 공용 주차장에 세운 차에 잠시 탔다. 일기장을 펴고 몇 자 적고 있는데 부엌의 불이 켜졌다. 지안이가 잠들었다는 신호이다. 집 문을 조심스레 열고 조용히 들어가 잠든 지안이를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지안 엄마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있잖아 나… (머뭇거리며) 할 말이 있어.”


“(지안이만 쳐다보며) 어 말해”


“나 다음 주 월요일에 법원에 가. 같이 가줄 수 있어?”


난 표정이 일순간 잠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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