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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Oct 16. 2024

14화 리무진

그들이 바라본 곳

리무진


깨어나니 현실이었다. 눈을 뜨자 간밤에 날린 돈과 빚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호식이의 표정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당구장을 안 가면 만날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은 서로 안다. 호식이와 라면 한 끼라도 같이 먹고 헤어졌다.


오래간만에 적막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어색했다. 이 시간에 당구장에 있을 때가 많았는데, 굉장히 어색했다. 당장이라도 나가야만 할 것 같았다. 불안이 밀려왔다. 마음은 당구장에 있었고, 호식이와 짜고 칠 계획을 구상하는 내가 보였다.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당구를 몇 번이나 끊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다. 그래도 그때마다 며칠은 버티곤 했는데, 이번 불안감은 좀 세다. 지금 당장 가면 이 불안은 해소될 것을 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TV를 봐도, 영화를 봐도, 게임을 해도, 생각은 어제의 필름이 자동으로 재생될 뿐이었다. 분노가 치솟다가 잠잠해지기를 반복하며 하루를 버티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당구 생각이 나와 함께 깨어났다.


'잃을 때도 있지. 이대로 물러날 거야? 분하지도 않아? 좀 조절해서 치면 되지.'

 

나를 설득하고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일단 여기를 떠나 날 고립시켜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 시외버스를 탔다. 아버지는 5년 전 위암 수술을 하고 지금 폐와 후두로 전이되었는데, 지역병원에서 체력이 안 되는 그를 개복수술을 한다는 걸 형이 병원이 떠나가라 화를 냈었다. 체력적으로 위험할 수 있어 복강경 수술이 가능한 대형병원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몇 달 전에 그 수술을 마치고 입원해 있는 곳이다. 수술 후 처음 가는 것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그가 미웠고, 그에게 감정을 끊으려 애썼던 것은 학창 시절 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냥 그런가 보다고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구를 끊기 위해서가 아니면 언제 갔을지 모르는 길이었다.


도착해서 더 야위어진 아버지를 봤지만, 여전히 그에게 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걱정이었다. 많이 수척해 보였다. 인근 찜질방이라도 다녀오시라고 권한 후 교대했다. 나는 아버지 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그렇게 흘러갔고, 오늘도 병원 로비에서 잠을 자려고 누워있다.


내일이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원에서, 이렇다 할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병원을 거닐던 며칠 동안,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병원 복도를 가로지르는 휠체어, 그 위에서 환자는 마치 리무진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병원 직원은 빠르게 휠체어를 밀며 그 피곤한 몸을 넘어서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의 노력과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오랜 투병생활을 지켜보는 가족들은 꽤 지쳐간다. 지난 몇 년 어머니를 봐와서 안다. 그런데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며 간호를 하고 있는  밤늦게 홀로 복도에서 눈물을 훔치고 때로는 우는 모습이 내게는 깊은 여운을 남겼다. 누구나 삶과 죽음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가족이 걸어가는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해 끝까지 노력하는 리무진 운전기사처럼 보였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더 편안하게 해주지 못해서 흘렀던 눈물 같았다.


자신의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지극정성을 다하는데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은 나에겐 낯설었다.


난 허세와 탐욕에 가득 차 리무진의 외형을 가지고 싶어 했지, 그 차 안에 누군가를 태우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산책을 하고 싶다고 해도 당구 치느라고 핑계를 대며 운전하지 않았다. 가족뿐 아니라, 누군가를 편하게 태워줄 마음을 품은 적이 별로 없었다.


'아무도 태우지 않을 리무진을 가진 들 내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내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


로비의 텅 빈 공간에 누워 여러 질문들을 두서없이 던지며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응급실 앞에 끊이지 않는 사이렌소리가 들린다.


'그래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초를 다투며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1초를 소중히 생각한 적이 있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병원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 희망의 눈빛들이 건물 곳곳에 남아 있다. 바닥에도, 벽에도, 타인의 눈에도, 의사의 가운에도 그대로 전해져 담겨있다. 그 희망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며칠이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나란 놈은 잘 산다는 게 뭔지 알 턱이 없다. 지금처럼만 살지 말자.'


안갯속에 있어서 하늘의 별빛을 못 본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안개 밖만 보려 해서 안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빛은 내 눈앞 어디라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들이 바라본 곳에 심어져 있다. 지금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를 바라보느냐의 문제다. 이 씨벌건 눈부터 정화하자.'


살짝 깔린 새벽안개가 전보다 투명하게 느껴졌다. 병실로 올라가 내려갈 준비를 했다.


"밥 잘 챙겨 먹고, 이제 더 이상 치료할 게 없다니 곧 아버지랑 내려갈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나오지 마세요. 갈게요."


돌아서 나가다가 잠시 멈춰 뒤돌아 서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이렇게 바라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뼈밖에 안 남은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잘라버린 줄 알았던 감정의 뿌리가 다시 자라 내 발걸음을 잠시 묶었다. 어제까지도 느끼지 않았던 복잡한 감정들을 참으며 가벼운 목례를 하고 돌아서 병실을 나왔다. 유난히 춥고 길게 느껴졌던 겨울 휴가의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도중아~ 이거 가져가. 버스에서 배고프면 먹고. 도착하면 전화해."


이번 휴가의 끝에 나는 썩어빠진 내 생활을 치료받을 수 있게 입원시키고, 따뜻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빛을 바라보며 지난 삶에서 퇴원하듯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실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잡히지가 않아서 그냥 일단 일부터 열심히 하는 것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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