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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Oct 11. 2024

12화 쪽박걸

파란 칩을 놓다

쪽박걸


"쟨 호텔 올라갈 와꾸인데 오늘 공쳤나 보네."


상기 형님의 말에 어리둥절한 내가 이해하지 못하자, 사장님이 덧붙였다.


"양도중, 너 카지노 처음이랬지? 여기 발 잘못 들였다가 인생 망한 사람들 많아. 방금 본 여자는 앵벌이나 칩걸 혹은 쪽박걸일 거야. 너 나중에라도 카지노에서 돈 따고 있을 때 은근슬쩍 붙는 여자들 조심해라. 대부분 저런 얘들이니까. 인근 모텔에서 돈 딴 놈이랑 자고 받은 돈으로 또 도박하고 또 잃고... 이 산을 못 벗어나는 여자들이야...(중략)... 그래도 저 정도라 살아가는 거지. 몸매 안 되면 태워가지도 않아."


질린다. 사장님 또 말이 많아진다. 한 귀로 흘리면서 창밖을 보며 매서운 바람 소리를 듣는데, 죽은 삶을 사는 듯한 사람들이 저 산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듯했다. 난 그 소리에 홀린 듯 스르륵 눈을 감았다.


도중이가 탄 차가 그녀를 지나갔다. 여자 앞에 잠시 밝혀졌던 길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 순간 여자는 생각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방금 지나간 차라 생각했는데 아니네. 그 남자 분명히 온다. 오늘도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아.'


'번쩍, 번쩍'


뒤에서 쌍라이트가 비추더니 내 옆에 멈춰 창문을 내렸다.


"야! 여기 있었네. 한참 기다리다 왔네. 타!"


"누구세... 아, 아까 그분."


"환전하고 나간다고 밖에서 기다리라니까 그걸 못 참고 내빼나. 탈 거야? 말 거야?"


오늘 내가 시간을 제일 많이 들였던 남자가 왔다. 눈을 털며 간을 보는 척하다가 차에 탔다.


"하도 안 나와서 그냥 한 소리인 줄 알고 내려왔지. 도박에 미처서 할 거 다하고 폐장 때 만나자는 놈치고 나온 놈을 거의 못 봤거든. 이런 일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오빠도 뻔하다 생각했지. 음~근데 오빤 좀 다르네. 찾아오기까지 하고"


"야! 그만 떠들고 일단 아까 얘기한 50만 원 받아"


10만 원 주는 것도 아까워 만 원이라고 깎으려는 놈들이 많았다. 어떻게든 싼 가격에 나랑 자려하는 놈들과 달랐다. 게다가 5배나 되는 돈을 심지어 먼저 다. 이 돈을 보면 공들인 보람은 있지만, 이 남자가 약간 불안하다.  


"뭐냐? 내가 이 돈 갖고 튀면 어쩌려고 먼저 주냐?"


"보면 알아. 튈 애인지 아닌지. 넌 이 정도 금액에 튈 애가 아니거든. 니 사이즈가 딱 그래 보여. 5백이면 튈 생각은 하겠지."


차는 숙박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모텔촌을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근데, 방을 어디다 잡아놨는데? 너무 먼 데 잡은 거 아냐?"


말은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뭔가 불길했다.


"거의 다 왔어."


남자에 대한 내 촉은 틀린 적이 없다. 별의별 놈들이 오는 곳이기에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난 관상까지 틈틈이 공부했다. 이 남자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다고 파악했었다. 혹시나 놓친 것이 있나? 카지노에서 그와 있었던 일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오늘 내 느낌이 틀린 날이라면 위험할 수 있다.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여자들은 지금 산속에 묻혀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산에는 나무보다 사람이 많다는 소문이 나도는데 실제로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야! 뭐 해? 안 내려?"


생각에 잠긴 사이 모텔촌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제법 괜찮아 보이는 모텔에 도착했다.


"어... 어... (머뭇거리며)"


경계심을 품고 모텔로 들어갔다. 늘 보면 돈을 뺏길까 봐 불안해서 씻지 않는 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냄새나는 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더러운 몸으로 날 바로 덮치는 것뿐이었다. 내가 돈을 갖고 튈까 봐 내가 잠든 후에야 자는 놈도 있고, 아예 잠을 잘 못 자는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 그냥 돈이며 명품 시계까지 다 펼쳐두고 씻으러 들어갔다. 그에게서 '뺏길까 봐'라는 불안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나오고 나도 씻기 위해 들어갔다. 샤워기를 세게 틀고 아무렇지 않은 척 노래를 부르지만,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도망갈 방법만 생각하였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그래 내 촉은 틀리지 않아. 부딪혀 보자.'


백 마디 말과 생각을 주고받는 것보다 몸으로 부딪혀보면 상대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뱃심 꽉 주고 평소보다 더 과감히 가운을 벗어버렸다. 그가 서서히 다가오는데 살짝 두렵고 무섭기 시작했다. 그는 내 미세한 떨림마저 감지하려는 듯, 손끝에 모든 감각을 집중해 나를 만졌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내 불안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손과 눈이 내 온몸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졌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의 숨겨진 속내를 듣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했지만, 들리는 것은 그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그의 힘에 압도되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때, 그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며 다가왔다.


'쿵 쾅, 쿵 쾅'


내 심장 소리가 모든 소리를 뒤덮었다. 나를 완전히 제압한 그가 내게 다가오는데 꼼짝할 수가 없었다.


우려와 달리 그는 가벼운 입맞춤을 몇 번 하는데 내 의사를 조심스레 물어보는 듯했다.  입술이 열리고 불안과 공포가 밖으로 빠져나기기 시작했다. 나를 다루는 그의 태도와 행동은 여전히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손끝에서 부드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그가 이끄는 방향을 따라가 그 끝에 다다른 순간, 나는 그를 꼭 껴안았다.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이 널브러진 채 천장의 거울을 보니,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내가 보였다. 이내 살아있음에 마음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주변을 살펴보며) 거기 라이터 좀."


"여기."


"(담배에 불을 붙이며) 너, 근데 왜 이리 불안해하냐? 내가 니 죽일까 봐? 너 죽여야 똥값인데 내가 너를 죽일 이유가 있나. 생각하는 거 하곤. 너 나랑 가자. 너 정도면 지역에서 에이스 될 수 있어. 잘만 관리하면 텐프로 입성도 가능해."


"불안하긴 뭘 불안했다고... 그리고 오빠! 내가 그렇게 막 나가는 애로 보이니?"


"하하하. 미친년. 너 어차피 이 돈 갖고 또 올라가서 털리고, 내일은 아마 다른 모텔에 있을 걸. 재수 좋으면 돈 좀 있는 남자 만나 호텔 올라갈 텐데 그건 너한테 잭팟 수준이야. 넌 아직 그 정도 안돼.  변두리 모텔만 도는 그 삶에서 못 벗어나. 너 같은 족속들은 뻔하거든. 아니야?"


"왜 안되는데? 아닐 수도 있지. 봐봐. 이거 보여?"


난 가방에서 파란 칩을 꺼내 들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거 100만 원짜리 칩이잖아"


"이 지옥 같은 삶에서도 절대 환전 안 하던 거야. 난 이 파란 칩으로 일어설 거야. 한 창 잘 나가서 호텔에서 숙박하며 놀 때도, 전 재산 다 날릴 때도 절대 바꾸지 않던 거야"


"후~우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야! 시끄럽고. 그 파란 칩에 0 하나 붙여줄 테니 나한테 넘기고 따라와. 너 정도면 좀만 처발라도 첫 달부터 천은 벌 수 있어. 갈래? 말래?"


난 수없이 걷던 저 산 길이 지옥길인 걸 안다. 화려한 빛을 좇아 살다가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고 모든 게 무너졌다. 이 파란 칩마저 놓아버리면 진짜 끝날 것 같아서 꼭 쥐고 버텼다. 모든 연락을 끊고 이곳에 날 가두고 언제부턴가 나갈 생각조차 안 하던 나날들이 계속됐다. 죽어서도 이 산에 묻힐 만큼 못 벗어난다는 건 나도 안다. 아니 어쩌면 나가는 것이 더 두려울 만큼 이곳이 편해진 건지도 모른다. 이 오빠를 따라간들 또 다른 지옥인 것도 알고, 어차피 있어봐야 지옥인 것도 안다.


파란 칩을 바라보며 줄담배를 폈다. 방안에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깔리고 있었다. 무슨 선택을 한다 해도 내 인생은 이 안갯속 같은 연기안에 있을 뿐이다. 그동안 이런 말을 하는 놈들을 몇 번 만났지만 다 남자들의 허세이고 거짓인 걸 알기에 고민조차 안 하고 단칼에 결정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다르다. 이 느낌과 촉이 날 어디로 이끌지 모르겠다. 


'언제 끝날까? 이 도박같은 선택의 순간들이 죽어야 끝나려나? 어디를 가도 지옥이이지만 여기보다는 낫겠지 '


나는 이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오빠, 약속 지켜라."


"무슨 약속? 지 생각해서 말했더니. 여기서 산속 귀신 되든가. 싫으면 말아."


그의 눈을 잠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갈게. 흐음... 이거 받아. 맡겨놓는 거다. 나중에 꼭 찾을 테니까 잘 보관해 줘."

 

"지랄한다. 진짜 가지가지한다. 야! 넌 이 칩을 놓아야 일단 살아."

 

"근데, 오빠 내 이름 어떻게 알았냐? 방금 '살아'라고 하지 않았어? 내 이름이 사라거든 크크"


"미친. 처음 볼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이거 진짜 완전 또라이네. 여기 나간다니까 갑자기 좋냐?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그 칩 이리 내놓고. 사라야 이리 와봐."


그가 내게 칩을 달라며 손을 뻗었다. 없어지면 죽을 것만 같아서 꼭 쥐고 있던 파란 칩을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나는 이곳의 생활을 다 잊기 위해 온몸을 불확실한 미래에 맡기며 내던졌다. 강하게 날 붙잡는 이곳을 탈출하고자 더 거세게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 길이 또 다른 지옥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나의 처지를 바라보며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은 그의 가슴에 땀방울과 함께 떨어졌다. 참 지치고 긴 하루가 오늘 또 이렇게 끝났다. 나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사라가 잠이 드는 그 순간, 도중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겨울산을 빠져나와있었다. 깨어나면 현실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울긋불긋한 단풍들이 어둠을 이기고 해 뜨는 하루를 맞고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출출한 배를 달래고 헤어지기로 하고 우동 한 그릇씩 먹었다.


"도중이 너 집이 어디랬지?"


"아, 저기서 세워주세요. 걸어가도 될 거리예요. 걷고 싶어서요."


차를 내려 새벽이슬을 맞으며 들어갔다. 참 길고 긴 하루였다. 내가 다녀온 카지노의 날씨는 매우 음산했다. 난 그런 날씨가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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