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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Oct 08. 2024

11화 카지노

칼날 같은 바람이 스쳤다

카지노


주차장

눈 덮인 차들의 겨울잠


컴컴한 도로를 달려 카지노에 도착했다. 이곳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당구장에서의 짜증과 욕심은 모두 녹아내렸다. 한쪽에 수없이 늘어선 차량 위에는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사장님, 이 차들은 뭐예요?”


“뭐긴 뭐야. 저당 잡힌 거지.”


차량을 담보로 도박 자금을 구한 것이라고 했다. 그 많은 눈을 맞으며, 마치 겨울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TV에서 보았던 카지노의 실상을 주차장에서부터 직접 목격했다.


‘이 차를 과연 찾아갈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구 칠 때도 있는 돈을 다 털리고, 빌려서까지 칠 땐 이미 복구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카지노라고 상황이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차주들이 다시 찾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혹시 차를 다시 찾는다 해도, 또다시 잡힐 확률이 더 크다. 한 번이 어려워서 그렇지, 두 번째는 할 수 있는 행동이 되어버린다. 저 앞에 보이는 호텔의 밝은 불빛에 차에 쌓인 눈은 더욱 선명해질 뿐 녹지 않는다. 차들의 겨울잠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불빛을 따라 호텔 정문에 도착했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로비에서 신분 확인을 마친 후, 카지노에 들어왔다.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화려한 불빛과 수많은 카메라가 천장에 거미줄처럼 촘촘히 쳐져서 나의 시선을 묶어버렸다. 슬롯머신의 기계음과 사람들의 환호와 탄식이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이제 일행들은 게임을 하러 각자의 테이블로 흩어졌다. 나는 사장님이 가는 블랙잭 테이블로 따라갔다.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며 음료수를 뽑아 마시고, 10만 원을 환전했다.


사장님의 새로운 모습


블랙잭 테이블에 도착했다. 어제 아침 영화에서 봤던 게임이었다. 사장님은 뒷전에 서서 테이블에 앉아있는(앞전) 선수들의 표정과 실력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블랙잭은 선수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임이니까 앞전 선수들을 잘 봐야 해. 블랙잭의 목적은 딜러를 버스트(카드 합이 21을 넘기는 것)시키는 거야. 그래야 플레이어들이 낮은 수라도 다 이길 수 있어. 카드 숫자 중 10이 제일 많아서 나올 확률이 높아, 그래서 확률적으로 받아서는 안 되는 상황이 있는 거야. 그리고...(중략).. 이런 게임이야.”


“근데, 사장님,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어요?”


몰랐다. 평소에 당구를 좋아하는 모습도 없었고, 항상 사업하는 사장님 모습이었다. 그의 최측근의 말에 의하면 그는 쓰러져가는 당구장을 인수해 살려서 팔아가며 사업을 일으켰다고 했다. 인수한 당구장을 다 살려 놓는다고 해서 혹자는 그를 당구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칭했다. 평상시 내기 당구도 안치고, 혼자 낚시하는 걸 즐기는 그가 이렇게 카지노에서 베팅을 하며 말을 많이 하는 모습에 놀랐다. 더 듣고 있기도 지겹고 다른 곳을 구경하고 싶어서 발걸음을 옮겼다.


"사장님,  구경 좀 다닐게요. 많이 따세요."


넘치는 돈통, 칩으로 세운 빌딩


이동하다가 다른 블랙잭 테이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딜러의 돈통에 현금이 넘쳐났고, 그 테이블에서 앉아 게임을 하던 중년남자가 그걸 보고 화를 내며 말했다.


"그거 좀 안 보이게 정리 좀 하면 안 되나? 사람 놀리는 거야 뭐야?" 


칩을 높게 쌓아 몇 줄을 만들어 놓은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60대로 보이는 여성 손님은 이걸 보고 말했다.


"젊은이, 그거 좀 환전하면서 하면 안 되나? 안 보이게 수건으로 좀 가리든가. 계속 눈에 거슬리네."


그 말에 젊은이는 수건으로 덮어 놓는다. 신경이 예민하고 날카로운 이들의 공통점은 돈을 잃고 있었다. 돈 앞에서 상반된 사람들의 표정들을  관찰하며 다른 게임 테이블로 이동했다.


뱅뱅 돌아가는 세상


룰렛 테이블이다. 돌아가는 룰렛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도 따라 돈다. 속도가 느려지고 통통 튀는 공이 보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마음도 콩닥콩닥 튀는 듯했다. 룰렛이 멈추기 몇 초 전 이들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다. 가만히 공과 룰렛을 보고 있자니, 나는 공만도 못한 기분이 들었다. 룰렛 속 공도 어디에 멈출지 모르는데, 내 모습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내가 있는 곳은 뻔해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룰렛을 바라봐서 그런지 재미가 없어졌다. 특히,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 긴 게 내 인생만큼이나 지루했다. 재빨리 자리를 옮겨 이동 중 한 곳은 내 시선을 끌었다.


주사위 세 개에 뺏긴 칩


다이사이 테이블이었다. 주사위 세 개로 하는 게임이었다. 작은 통 안에서 세 개의 주사위가 통통 튀고, 멈춘 눈금들이 결과를 내놓는다. 상기 형님이 이곳에 있었다. 잠시 베팅 방법과 게임 룰을 배우고 여기서 게임을 하기로 했다. 거는 곳마다 틀리더니 순식간에 가진 칩을 잃었다. 고민하다가 10만 원을 더 환전하고 나서 소지한 모든 카드를 부러뜨려버렸다. 돈을 찾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지 않으면 통장 잔고가 0원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부루마불 할 때는 주사위 두 개에 종이돈을 잃더니, 커서는 주사위 세 개에 칩을 다 잃었다. 역시 나는 주사위를 피해야 한다. 자리를 떠서 이동했다. 테이블 중 안 가 본 곳이 아직 한 군데 남았다.


x2, x3


바카라 테이블이었다. 여기 오는 차 안에서 도진이 형님의 주력 종목이라고 들었는데, 가보니 그가 게임 중이었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300만 원을 잃었다고 했다.


"도중아 잘 왔다. 이거 받고 형이 가는 곳에 따라와."


테이블 맥심 베팅액이 30만 원인데, 그는 내게 10만 원짜리 칩 3개를 주며 자신이 거는 쪽(플레이어 또는 뱅커)으로 배팅해 달라고 한다. 투 핸드로 60만 원씩 베팅하다가 상기 형님까지 합류해 쓰리 핸드로 90만 원씩 베팅하기 시작했다. 이 게임 진행속도가 너무 빠르다. 딜러가 자기 앞에 카드 몇 장 착착 깔더니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된다. 결국, 그는 600만 원까지 잃고 자금을 구하기 위해 흡연실로 향했다. 나는 정신없던 이곳을 떠나 다시 카지노 안을 배회했다.


폐장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곳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한쪽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아까보다 더 많아졌다. 흡연실에서는 돈을 구하기 위해 전화하는 사람들로 붐벼댔고, 한쪽엔 아예 쓰러져 담배 연기에 질식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반면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웃음이 보였다. 폐장 시간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더욱 극명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폐장 시간이 되었고, 청소시간을 갖고 다시 개장할 때까지 다 나가야 했다. 나는 더 베팅하지 않았던 칩을 다시 환전했다. 하지도 않을 걸 카드는 왜 부러뜨려서 일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일행은 다시 입구에서 모였다. 마지막 도진이 형님을 기다리면서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들 중에는 잃어도 즐기고 웃으며 가는 이, 밤새 모든 걸 걸었던 이, 돈을 따고 세상을 다 가졌다고 착각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들 사이로 도진이 형님이 안도의 숨을 쉬며 나오고 있다. 결국 80만 원을 땄다고 한다.


'그래, 이 중엔 저 미친놈 같은 전문 도박꾼도 있었다.'


지역에서 하우스 판에 취직이 안 된다고 하더니 대단하기는 하다. 모두 모여 밖으로 나갔다.


'으, 추워~'


이 매서운 추위에 오늘을 끝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이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 누군가는 산속이나 인근 모텔, 혹은 차 안에서 죽은 주검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발견되지 못할 곳에서 긴 겨울잠을 잘지도 모른다. 그 순간, 이곳의 칼날 같은 바람이 날 스쳐 지나갔다.


카지노 퇴장

한 여자


도착했을 때 봤던 눈 덮인 차들은 그 사이 더 쌓였을 것이다. 앞전 자리를 맡았다가 되파는 사람들, 생활도박으로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들, 연락을 끊은 채 찜질방에서 자고 먹고 하는 사람들의 생활들을 몇 해 전 TV에서 본 적이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삶이라 체념하고 사는 이들은 지금 현재도 시린 겨울눈을 맞고 있는 수백 대의 차처럼, 카지노 안에서 기나긴 겨울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름 신선해서 재미있었던 카지노의 첫 경험을 마치고 차를 탔다. 다행히 일행들은 많이 잃은 사람이 없어서 분위기가 괜찮았다. 차 안에서 도진이 형님이 복구한 얘기를 들으며 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시선이 끌리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이 추운 날씨에 꽤 먼 거리를 걷고 있었고, 롱코트도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감출 수 없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난 처음에 과장 좀 보태서 귀신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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