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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Oct 06. 2024

10화 선택

누런 짜증과 시뻘건 욕심

양해를 구하는 글

지난 9화에서 도중이를 덜 재웠습니다. 마흔두 시간을 재워야 하는데 서른 시간만 재웠습니다. 9화에서 도중이는 낮 1시에 자서 아침 7시에 일어났는데, 머리 나쁜 작가는 서른 시간을 잤다고 표현했습니다. 산수 못하는 작가의 시간 계산에 착오가 있었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도중이를 부족한 잠에서 열두 시간 더 재우기로 했습니다. "더 자자. 도중아. 내가 잘못했다. 많이 피곤했을 텐데 내가 실수했다. 더 자자."

실수든 실패든 이제 그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 이미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의 의식 속에 내 모습은 남아 있다. 단어 하나 바꾼다고 내 모습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선택은 항상 나의 몫이다. 나는 그냥 그렇게 내 길을 걸어간다. 어쩌면 나도 도중이처럼 죽음까지 이어지는 이 안개 같은 인생길을 걸어갈 뿐이다.

실수를 기억하고, 현재의 행동을 선택해, 미래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10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마흔두 시간 잔 도중이는 당구장으로 들어서며 오늘도 이 자동문에 빨려 들어간다.


선택


청소를 마친 사장님이 앉아 있다.


"안녕하세요?"


"오호, 양도중이 이게 며칠만이야?"


사장님은 친한 단골들의 성을 이렇게 부른다. 양아치 도중이라는 뜻이다. 양도중, 양호식, 양종신, 양진원, 양상기, 양도진 이런 식이다. 커피 한 잔 하고 나서 나는 연습구를 치기 위해 큐를 꺼냈다. 큐를 잡아보면 그날의 느낌이 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좋다. 잃은 돈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간 정도 연습하니 땀이 살짝 나고 손바닥이 큐의 고무 그립에 찰싹 달라붙는다. 이제 사람들이 오기만 기다리면 된다. 그때 종신이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도중 형님! 빨리 오셨네요.”
 

“어, 종신아. 어서 와. 단짝은 어디에 두고? 혼자 왔어?”
 

“같이 왔어요. 주차하고 올 거예요.”
 “사장님,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이 시간에 만차네.”
 

“5층 사무실 사람들 차일 거야. 오늘 세미나 있데. 진원이 안 내려오는 걸 보면 아직 안 끝난 거지”


진원이 형님은 직장 아침 회의를 마치면 당구장에 곧장 온다. 저녁에 잠시 마감하러 직장에 갔다가 다시 당구장으로 돌아오는 게 그의 기본 루틴이다. 그는 당구를 정말 잘 친다. 이 형이 잃은 적을 본 적이 없다. 잃었을 때는 밤을 새워서라도 따고 가고, 어느 정도 따면 가정 핑계를 대며 일찍 빠져나간다. 그런 형의 얄미운 모습은 간혹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씹히기도 한다. 


그는 공을 칠 때 준비동작에서 눈을 꿈뻑꿈뻑거린다. 마치 자동차가 비상등을 켜고 서행하는 듯, 예비 큐질하는 시간지루할 정도로 길다. 한 시간마다 치는 순서를 바꾸는데, 그의 다음 순서에서 치게 되면 나는 한 시간 내내 추월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으로 쳐야 한다. 비상등 켜고 천천히 가는 차를 추월하기 힘들 때 느끼는 답답함과 짜증이 밀려온다. 내가 따고 있을  땐 그나마 신경이 덜 쓰이지만, 잃고 있을 때는 상당히 거슬린다. 비상등 켠 차를 보면 '급한 일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확 들이박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 온 신경도 덩달아 심하게 깜빡거리며 당구가 말릴 때가 많다. 이 형만 없으면 할 만한데, 오늘은 그가 안 왔으면 좋겠다. 그냥 출장이나 발령받아 이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진원이 형님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호식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왜 안 치고 계세요? 도중이 형, 그저께 왜 안 왔어요?”

 

“마흔두 시간 잤어. 저녁인 줄 알고 왔는데 오늘 아침이더라. 그날 미용실 사장은 얼마 잃었어?”


본전일걸요. 아는 동생이라고 한 명 데리고 왔는데, 그 사람이 많이 잃었죠. 300알 정도 되는 것 같던데.”


“얼마짜리 쳤는데?”

 

“5천 원짜리요.”


“많이 잃었네. 그 사람 치는 건 어떤데?”


“미용실 사장보다 더 못 쳐요. 크크크. 마르지 않는 돈줄이 새끼까지 친 거라 해야 하나.”


“하하하. 그럼 시작해 볼까?”


나, 호식, 종신 세 명이서 가볍게 3포로 게임을 시작했다. 몇 큐 쳐보니 예감대로 잘 맞는다. 나는 18점을 치며 돈을 따기 시작했다. 오늘 시간은 내 편이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중국집에 시켜둔 음식이 배달 왔다. 잠시 끊고 저녁 먹는 중에 형님들이 하나둘 오기 시작했다. 이제 판을 다시 짜서 오늘 본 게임이 시작된다. 30분 후에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런 때가 면, 주머니에서 검은 칩을 꺼내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쪽박 차며 다 잃다가 이 칩 하나 남기고 30점을 친 날이 있다. 잃은 돈을  다 찾고 오히려 딴 날에 챙겨둔 칩이다. 그날 이후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당구칠 때 만지는 일종의 징크스 같은 것이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나와 상기 형님, 도진 형님이 합류한 5포로 게임을 시작했다. 다행히 진원이 형이 안 왔다. 늘 그렇듯 3천 원짜리로 시작하였다. 누군가 잃게 되면 판돈이 올라간다. 3천 원, 5천 원, 만 원으로 올라가는 것은 뻔하다. 초장에 좀 따고 빠지든가, 가볍게 놀다가 끝에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오늘은 기복 없이 당구가 줄곧 잘 되는, 소위 치면 맞는 날이다. 이대로 밤새 친다면 얼마 전 잃은 300만 원을 찾고도 남는다. 템포를 빠르게 가져갔다.


당구가 잘 될 때, 오히려 템포를 빨리 가져가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반대로 상대가 잘 될 때, 템포를 늦춰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지금 호식이가 인터벌을 길게 끌고 있다. 호식이는 제일 아끼는 동생이라 그럴 리 없겠다고 믿지만 설마라는 의심이 멈추지 않는다.


'설마 호식이가 내 템포를 깨서 흐름을 끊으려고 하나? 돈을 잃었다 나한테 그런 머리까지 쓰는 건 아니겠지?'


결국 나는 이 흐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호식이에게 말한다.


“호식아! 뭐 해! 너 칠 차례야! 빨리 쳐!”


알았어요!


내가 믿지 못하는 걸 눈치 못 챌 호식이가 아니다. 묘한 기류가 형성되는 그때 전화가 왔다.


'따르릉~'


호식이의 전화기다.


“네, 지금 갈게요."


호식이가 마지막 말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형님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도중이 형, 나중에 전화할게요."

 

이 밤에 저렇게 말하는 것은 일하러 가는 경우이다. 호식이는 호빠에서 일하는데 손님에게 지명된 것이다.


그래. 지명이야?”
 

“네.
 

“어, 일 잘하고 나중에 봐.”


이렇게 말하지만, 짜증이 밀려왔다. 한창 끗발 좋을 때 판이 빠다리 날 위기에 처했다. 사실, 다들 평소보다 당구를 못 치고 있어서 많이 잃고 있었다. 그중 제일 많이 잃고 있던 호식이가 나가니 다른 사람들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진 것이다. 그날 복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멘탈이 안 나가면 어느 정도는 안다. 분노에 휩싸여 상황파악을 못하고 오기를 부리는 날이 골로 가는 날인데 오늘 그런 사람은 안 보였다. 그래도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넌지시 던져본다.


“호식이 다음 차례가 누구였지? 아, 도진 형님이 치면 되겠다.”
 

스~톱, 오늘 여기까지


‘아니나 다를까. 흐음, 흐름이 끊겼다.’
 “종신이 넌?


"저야 판만 돌아가면 계속 치죠."


그러나 형님들이 모두 그만 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칠 사람은 나랑 종신이 뿐이라 끝내기로 했다.


“오케이, 막 큐 하죠.”


마지막 한 큐씩 더 치고 게임을 마무리했다. 환전 결과 150만 원을 땄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다 쓸어 담을 수 있는 판을 접어야 해서 오히려 짜증이 났다.  이렇게 따고도 만족스럽지 않다. 있었을 텐데, 호식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후우. 운 한 번 더럽게 없네. 혼자 독식할 기회가 이렇게 날아간다고?'


이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걸 아는데도 짜증이 났다. 들끓는 이 감정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점점 더 커진다. 나는 공이 부서질 듯 세게 치고 있을 뿐이다. 큐를 선택하고, 공마다 칠 방법을 선택하고, 지명으로 사람까지 선택하는데, 마음이라는 것은 왜 선택을 못하는 것일까? 앞에 굴러다니는 노란 공과 빨간 공을 보며 생각했다.


'때리고 때려봤자 네모난 다이안에서 도는 두 개의 공처럼, 누렇게 찌들어 붙은 때 같은 짜증과 시뻘건 두 눈에 가득 찬 욕심이 내 안에서 돌고 돌뿐이다. 내 약한 힘으로 이 공을 깨뜨릴 수도 없다.'


'빡!'


나는 풀 스윙으로 공이 부서지도록 치지만, 큐와 공의 강한 마찰에 누런 때만 덧칠해지고 두 눈은 분노에 더 빨개질 뿐이다.


“야 새꺄! 열 그만 내고, 너네 갈 거야? 말 거야?”


상기 형님이 물어본다. 다음 일정을 카지노로 잡은 것이다.


"아뇨. 친구랑 약속 잡아서 나가볼게요. 사장님, 저 가요."


그나마 치려고 했던 종신이 나가면서 당구 판은 완전히 끝났다. 짜증이 나고 있던 차에 나는 바람 쐴 겸 가기로 선택했다. 당구장도 닫을 판이라 홀로 있는 집에 가기도 싫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는 상기 형님, 도진 형님과 함께 사장님 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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