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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Oct 04. 2024

9화 안개

밝음과 어둠의 경계

안개


탁! 탁! (손가락 팅기는 소리)


"혀~엉!"


누가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걸 느끼고 눈을 떴다.


"도중이 형! 형 칠 차례야!"


"어... 어...? 나 무슨 공이지?"


"노랭이. 근데 형, 졸리면 그만 쳐도 돼요. 거울 좀 봐봐. 얼굴이 누렇게 떴어. 노란 당구공 같아. 이건 뭐 큐로 형 머리를 쳐야 될 것 같은데."


호식이 말이 맞다. 몸 상태가 맛이 갔다. 눈앞이 노랗고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래, 도저히 안 되겠다. 너무 졸리다."


"졸릴만하지. 36시간 동안 당구만 쳤다며. 좀 자고 저녁에 봐요. 오늘 미용실 사장 온다니까 꼭 와요. 복구할 기회니까."


몇 달 전에 당구장에 처음 온 미용실 사장은 당구를 쳤다 하면 항상 돈을 잃고 가는 인물이다. 그가 온다는 건 내가 얼마 전 크게 잃었던 돈을 복구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넌? 오늘 와?"


"네 점심약속 있는데 밥 먹고 바로 올 것 같아요"


"그래, 저녁에 올 수 있으면 올게."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졸려서 쓰러질 것 같다. 도저히 집에 갈 기력이 없어 포켓볼 테이블 옆 소파에 누웠다.


'얼마나 잤지?'


당구공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뜨고 포켓볼을 치는 여성 손님들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새빨개져 허둥지둥 일어나 당구장 카운터로 갔다.


"사장님, 왜 안 깨웠어요?"


"안 깨우긴. 시체인 줄 알았네"


"때려서라도 좀 깨워야지. 쪽팔리게. 호식이는 갔어요?"


"오전에 잠깐 들른 거래. 점심 먹고 온대."


"저도 집에 가서 좀 자고 저녁때 올 수 있으면 올게요."


마침 손님을 내려주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갔다.


"손님, 손님! 다 왔어요."


그새 잠이 들었다. 이 상태라면 저녁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쓰러졌다.


'얼마나 잤지?'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저녁 7시였다. 6시간 정도 잔 것 치고는 상쾌했다. 포켓볼 테이블에서 잠시 잔 것이 도움이 되었나 보다. 일어나 준비하고 당구장으로 향했다. 다행이다. 오늘 못 일어나서 기회를 놓치나 는데, 저번에 잃은 돈을 찾을 수 있다. 미용실 사장이 꼭 오기를 바랄 뿐이다. 당구도 잘될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쳤다. 36시간을 치면서 돈은 따놔서 오늘 총알도 넉넉하다. 준비하고 집을 나섰는데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고 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제 집에 올 때, 그렇게 멀게만 보였던 이 길이 지금은 가깝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인데 차와 사람이 평소보다 적다.


'날씨 때문에 다들 일찍 들어갔나?'


평소에는 돈을 딸 생각만 하면서 걸었던 길인데, 오늘은 좀 달랐다. 나는 평소와 달리 날씨에 흠뻑 취하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푸른색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 있는 회색이 좋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이런 날씨가 나를 차분하게 해 준다.


이 거리에 안개가 낮게 깔려 나의 색을 덮어주고 있다. 드물게 다니는 자동차의 빛이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다. 내가 누렇게 뜬 나의 얼굴시뻘건 눈을 숨기고 싶은 것처럼, 빛도 숨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빛이 '나 찾아봐라'라고 하는 듯 안갯속에 꼭꼭 숨어 찾기가 힘들다. 나는 안개가 걷힐 때까지 빛을 찾아, 뿌연 잿빛 속에서 빛과 숨바꼭질을 한다. '우우우웅~' 건물들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만이 내 마음을 알아채는 듯하다. 어디로 숨든지 금세 나를 찾아내 귓불을 베듯, 깊숙이 파고든다. 이 바람에 휘감긴 마음들은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 채 안갯속을 떠돌며 헤맨다. 이내 마음에 사뿐히 내려앉는 공기의 무게에 짓눌려, 내 마음은 바닥에 주저앉는다. 춥고 시린 겨울이 싫어 숨으려는 듯,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들은 서로의 손을 잡아 온기를 나누려고, 이 돌고 도는 세상의 소용돌이에 온몸을 던진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잡으려 손을 뻗을 뿐, 결국 이 땅 위에 내려와 겨울의 쓰라바람을 맞는다.


'나를 돌고 돌게 만드는 바람은 어디로 부는 걸까?'


오늘도 나는 뚫을 수 없는 이 안개에 나를 숨긴 채 희미한 가로등불을 바라보며 걷는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서도 이런 산한 날씨가 걷히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


'익숙해져 버린 이 날씨가 언제쯤 푸른빛에 깨어질까?'


생각에 잠긴 채 안개를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당구장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띵동~스으윽'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제야 지금이 아침이었다는 걸 알았다. 서른 시간을 잔 것이었다. 안개를 뚫고 온 곳은 또다시 안갯속 같았다. 저녁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시간의 안개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건지 어질어질하다. 닫혀 있는 유리 출입문 안은 어지럽혀져 있는 당구 테이블이 보였다. 한차례 큰 판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별 수 없이 옆 건물 피시방에서 영화 한 편 보며 가게 오픈을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본 영화는 친구가 일전에 추천해 준 <21>이었다. 한 팀이 블랙잭으로 카지노를 터는 이야기였다. 아직 가보지 못한 카지노 이야기라 흥미롭게 봤다. 시간이 흐르고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주변이 뚜렷해졌다. 나는 오늘도 당구장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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