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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Oct 15. 2024

13화 작대기

승부 조작에 흔들리는 유리

작대기


선택의 순간이 온다


'따르르릉’


호식이의 전화 소리에 잠이 깼다.


“어… 호식아.”


“형, 언제 오세요? 아까 점심때 미용실 사장이 왔었는데, 저번에 얘기한 동생이랑 저녁에 같이 온대요.”


“어, 그래? 좀 더 자고 저녁에 갈 수 있으면 갈게.”


“시간은 8시로 잡았고 미용실 사장이 판돈을 올리자고 해서 오케이 해놨어. 꼭 와요.”


“얼마짜리 치는데? 만 원?”


“아니요, 3만 원.”


순간, 판돈 얘기를 듣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미쳤네. 선수는 누구누구인데?”


“종신이, 나, 미용실 사장님, 그 아는 동생, 진원이 형님이 확정이고, 형 끼면 6포.”


“이렇게 큰 판은 처음인데, 내가 될까?”


“형, 제가 늘 얘기하잖아요. 이 당구장에서 형 스트록이 제일 좋아요. 형이 멘탈만 챙기면 진원이 형님도 형한테 안된다니까.”


 "그건 네가 좋게 봐주는 거고. 알았어. 갈게. 이따 보자."


자칫 잘못되면 견적이 천만 원까지 나올 수 있다. 망설일 새가 없다. 가서 오늘 컨디션을 체크해야 한다. 부적과도 같은 검은 칩을 챙겨 집을 나섰다. 가는 내내 주머니 속 칩을 만지는데 어제 카지노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호식이 말대로 정신줄만 챙기면 되는데, 난 오늘 여느 때보다 칩 하나에 감정기복이 더 클 것이다. 중력에 끌린 듯 당연하게 나왔는데 ‘칠까? 말까?’를 고민하게 됐다. 이 길을 걸으면서 해 본 적이 없는 선택의 순간이었다. 이 새로운 판이 두려웠던 거다. 당구장 앞에 도착해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다. 


호식이와 진원이 형이 가볍게 게임을 치고 있다. 난 큐를 손질하고 연습구를 치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촉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진이 형님이 어제 카지노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박할 때 손에 땀나면 그날은 따는 날이라고 했었는데, 평소에는 신경도 안 썼던 이 말이 오늘은 힘을 보태준다. 곧이어 미용실 사장과 그 동생도 도착했다. 곧이어 종신이의 합류로 오늘 치기로 한 선수들이 모두 모였다. 30분 후 8시 정각에 시작하기로 했다. 다들 마지막 점검을 하며 경기 테이블로 모여 자신의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난 세수를 하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종신이가 말했다.

  

“자, 이제 시작하시죠.”


8시가 다 되었다. 모두 초기 금액인 300만 원씩 칩 100알로 바꾸고, 1시간 게임 20분 휴식을 한 타임으로 정하고 연장 없는, 뽀찌 없는 10타임으로 합의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단, 중간에 나갈 시 딴 돈의 50%는 반납하고 나가야 하는 걸로 했다. 잃은 사람은 언제든지 나가도 됐다.


시간은 흐른다


1시간. 긴장을 푸는 것에 집중한 탓인지 다들 타수가 안 나온다. 30분쯤 지나자, 눈빛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2시간. 지금쯤 잃고 있어야 할 미용실 사장이 따고 있다. 이 모습에 다들 당황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살짝 감돌기 시작하는 긴장감 속에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시간이 흘렀다.

3시간. 긴장감은 극도로 치솟았고 이제 한 큐를 놓치면 아웃될 수 있다. 진원이 형이 치고 달린다.

4시간. 호식이 타임이다. 15점을 치며 한 큐에 200만 원을 당겨 본전을 찾았다.

5시간. 드디어 내 흐름이 왔다. 다음 타임에 이 흐름을 이어가면 끝날 때까지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대로면 천만 원이 가능하다.


흐름은 변한다


쉬는 시간 

긴장을 많이 해서인지 배가 아파 화장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잠시 후 미용실 사장과 호식이가 들어온다.


“역시 다들 잘 치네. 호식아, 넌 어때?”


“(퉁명스럽게) 그럭저럭요. 그냥 그래요.”


누군가 들어왔다.


(소곤소곤)


궁금해 화장실 안에서 문 틈으로 보니, 호식이는 나갔고 미용실 사장이 종신이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둘은 눈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도 의심스러웠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 게임은 단순한 게임이 아닌, 이미 짜인 판일 수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둘이 나가고 잠시 후 나갔다. 테이블에 돌아가 다음 타임을 준비하는데 화장실에서 봤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찝찝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 흐름은 내 편이다.


'짤 테면 짜봐라? 그런다고 지금 내 흐름을 막을 수가 있나?'


게임 재개 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난 여기까지 할게. 와이프한테 전화 왔는데 들어가야 하네.”


진원이 형이 잃었음에도 빠진다는 것은 다소 놀라웠다. 속으로 좋아했다. 그나마 날 막을 수 있는 것이 형이었는데 없는 게 낫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상황이 좋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의심이 들었다.


'진짜 일이 생긴 걸까?'


6시간. 미용실 사장의 흐름이다. 한 시간만 내 흐름이면 되는데 이번 타임은 그의 차례였다. 그런데 좀 세다. 쳤다 하면 6점, 8점, 10점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호구로 취급하던 그가 쳐대니 감정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7시간. 그의 독주가 2시간 내내 이어졌다. 갑자기 당구를 이렇게 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말도 안 되게 쳐댄다. 화장실 장면이 생각난다. 


'짜고 치는 거 아닌가? 가만 보니 종신이가 공을 어떻게 칠지 초이스 하는데,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다. 아는 동생은 저렇게 잃고도 왜 저리 태연하지? 난 왜 이리 공이 어렵게 뜨고 있지?'


내 템포까지 끊으려고 인터벌을 길게 끄는 등 모든 것에 의심이 들었고, 이 시간을 기준으로 미용실 사장 이외 모두가 잃기 시작했다.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의 오기


쉬는 시간 


“그만해! 티 안 나게 적당히 하든가!”


“뭐가?”


복도에서 호식이가 종신이한테 소리치고 있다. 언성이 높아 안에서도 집중하면 들릴 정도이다. 잠시 후, 들어온 호식이가 말했다.


“전 막 타임할게요.”


“저도 그만요.”


아는 동생도 기다렸다는 듯이 기권 의사를 말한다.


8시간. 이번 타임이 끝나고 호식이랑 아는 동생도 나갔다. 남은 타임은 나, 종신, 미용실 사장 셋이서 치게 되었다.

9시간. 꺼꾸재비로 100알을 잃었다. 따고 있을 때 그렇게 빨리 오던 내 차례가 너무 늦게 오고, 평소에 치던 공도 맞지 않기 시작했다. 현재 300만 원을 잃고 있다. 둘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다. 셋이라 그런지 템포가 빠르다. 그 속도에 칩의 높이도 빠르게 줄고 있다. 손이 떨리고, 머릿속은 난장판이었다. 큐를 잡는데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왜 그 돈을 못 지켰을까? 큐가 왜 절어 있었지? 지키는데 집중만 했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왜 내가 이렇게 된 건데? 후~우. 아무리 짜고 친다 해도 내 실력이 이렇게까지 될 건 아니잖아. 지금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점점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자존심을 포기할 수 없어 당구장 사장님께 말했다.


“사장님, 100알만 더 대출해 줘요.”


“양도중, 그만해. 너 오늘 큐로 복구 못 해. 100알이면 300만 원이야. 정신 차려.”


“마지막이에요.”


당구장 사장님은 한숨을 쉬며 100알을 주고 장부에 적는다. 이미 복구가 불가능한 것은 알고 있다. 짜고 찌는 것들을 부수고 싶었다. 분했다. 이 한 시간 동안 특히, 종신이를 잃게 만들고 싶었다. 세수를 하고 마지막 타임을 준비했다. 


깨어나면 현실이다


10시간. 손까지 떨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나에 대한 분노를 공에 표출하는 것뿐이었다. 이미 모든 기능이 떨어진 지금 공이 맞을 리가 없었다. 난 20분 만에 100알마저 다 털렸다. 


의심이 드는 순간이 많았다. 그런데 난 그걸 왜 이렇게밖에 대응할 수 없었나. 마치 시간을 강탈당한 듯 다른 세계에 다녀온 느낌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카지노에서 봤던 폐장 때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종신이와 미용실 사장은 남은 시간을 이어갔다. 종신이의 쓰러지지 않는 근성에 미용실 사장도 혀를 내두르며 남은 시간을 치고 있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종신이는 돈을 복구하려는 것보다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종신이는 내가 그동안 당구를 함께 쳐오며 봐왔던 초이스를 하고 있다. 


그 순간 의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짠 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도중이 형, 저 갈게요 (후~우)”


같은 마음인 건지 호식이가 날 바라보며 인사하는데,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미용실 사장한테 모든 사람이 다 잃었다. 난 견적이 600만 원이다. 호식이가 400만 원, 종신이는 100만 원, 아는 동생이 900만 원이다. 미용실 사장은 당구장 사장님께 계좌번호를 적어 준다. 호식이와 내가 당겨 쓴 금액을 사장님이 먼저 송금하려는 것이다. 당구장에 빚이 쌓였다. 미용실 사장은 큐를 정리하고 동생과 함께 나가며 인사를 하는데 쌩깠다.


작대기에 맞아 누은 밤


예전에 제법 큰 규모의 당구장에서 일할 때, 웬 산적 같은 손님이 온 적이 생각났다. 가볍게 큐를 들고 말하는 대로 치는 모습이 놀라웠던 기억이 났다. 당구장 직원 중 프로 선수였던 동갑내기 친구가 말하길,


“저분 유명해. 전국구 작대기 중 하나야. 프로가 될 실력임에도 프로 해봤자 돈이 안 된다고 전국을 다니며 내기 당구 치는 사람이야. 도중이 너, 나중에라도 저런 사람 만나면 피해.”


미용실 사장이 작대기 축에서 어느 정도의 레벨인지는 모르나 오늘을 위해 이미 이 당구장을 노리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를 그냥 당구를 좋아하는 돈 많은 사람으로 봤다. 그리고 오늘 그가 작대기인 것을 알았다.


“형, 많이 잃었어요? 아, 조금만 더 하면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뭐 먹으러 갈래요?”


종신이가 물어보는데, 얘랑은 먹을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종신이가 나가고 당구장 사장님이 말했다.


“양도중, 하지 말라니까. 딱 보면 모르나? 니들 사이즈가 아닌 걸. 진원이는 알고 먼저 빠지잖아. 야, 일어나. 밥이나 먹으러 가자.”


혹시나 하고 호식이한테 전화했더니 옆 건물 피시방에 있었다. 내려와서 같이 밥 먹으러 갔다.


“사장님, 돈은 한 달 안에 드릴게요.”


“천천히 되는 대로 줘. 이그 이 화상아.”


사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달 100만 원씩 세 달에 나눠 주기로 했다.


“호식아, 게임방 가 있지 말고 형네 집 가서 자자.”


사장님은 집 앞까지 태워다 주고 갔다. 옷을 챙겨주고 씻고 나와 컴컴한 방에 두 사내가 누워 대화를 시작했다.


“형은 오늘 이상하지 않았어?”


“많이 이상했지. 종신이랑 그 아는 동생이 말도 안 되는 초이스를 할 때가 많더라. 미용실 사장이 자기들 뒷 차례일 때는 놓치면 공 주는 초이스를 하고, 나나 너 앞에 서면 인터벌 끌면서 못 쳤을 때 디펜 되는 초이스를 하더라.”


“그걸 아는데도 가만있었어요?”


“판 뒤집고 싶을 정도로 열받았지. 거기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돈 잃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완전히 무너졌지. 의심은 들었는데 할 테면 해봐라였어. 그래도 미용실 사장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작대기인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다 털렸더라. 나중엔 넘을 수 없는 벽 같았어. 진원이 형은 이미 알고 빠졌는지, 같이 짜고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 됐든 진원이 형은 미용실 사장을 이미 인정했었네.”


“종신이 개버릇 못 준다더니, 예전에 친구들끼리 포커 치는데도 안경 쓰면 보이는 카드 세트를 어디서 구해가지고 친구들 사기 쳐 먹다가 딱 걸렸잖아. 형은 흐름 타서 당구가 워낙 잘될 때라 몰랐겠지만, 5라운드부터 종신이한테 그 느낌이 딱 오더라고.”


공사


“그동안 당구장 사장을 너무 얕보고 자만했었어. 어딜 가든, 벽은 항상 존재하는 것 같다. 어제 형이 카지노 다녀오면서 결정한 게 있는데, 오늘이 그날이 된 것 같아. 이제 형 당구 끊으려고. 아까 큐 부러뜨리고 나오려다 말았어. 형 큐는 네가 써. 팔아도 되고, 아직 팔아도 몇십은 나올 거야. 그동안 돌아보니 조금 딴다고 세상 다 얻은 줄 알고, 조금 잃었다고 세상 꺼진 줄 알고 하루에 감정 기복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 아까 다 잃고 앉아있는데 당구칠 때 내 모습이 어제 카지노에서 본 도박중독자들 같았고, 다 잃었을 때는 폐장 때 쓰러져 있는 사람들 같더라. 형은 더는 안 갈래. 그나저나 너도 많이 잃지 않았어?”


“400 정도요. 저도 당분간 당구장 쉬고 누나 일 도우면서 밤에 일에 집중하려고요.”


“진원이 형이야 안 잃었고, 종신과 동생이야 미용실 사장이 챙겨줄 거고 결국 너랑 나만 털렸네. 이런 걸 호빠에서 공사당했다고 하나?”


“뭐. 이건 공사 축에도 못 끼지만, 의미는 그렇죠.”


“오늘 고생했어. 내일부터 형은 남은 인생이나 공사하련다. 그만 자자. 잘 자.”


승부조작에 흔들리는 유리


프로 스포츠 세계에도 승부조작이 어제, 오늘이 아니라더니 작은 동네 당구장에도 일어났다. 


'내가 이 승부조작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 못 피한다. 짜고 치는 고스톱 판에서 살아남기란 힘들다. 내 실력이 더 높든가, 정신이 강하지 않으면 피할 수 없다. 아니면 끼질 말든가. 미용실 사장의 실력은 내가 넘을 수가 없었다. 유리 같은 정신력으로 이 큰 판의 도박을 끼면 안 됐다. 


'이 판은 내가 못 피한 거냐? 아니면,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거였을까?' 


도박의 세계는 언제나 짜여 있다. 짜고 치는 고스톱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듯, 이 당구도 다를 게 없었다. 승부조작은 앞으로도 크든 작든 여러 형태로 내 앞에 계속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내 실력과 내 정신뿐이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피해자로 살 수밖에 없다. 


'아 이 개새끼들.'


분이 풀리지가 않는다. 아직도 나는 이길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내 실력보다도 외부 요인들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면서 호식이 앞에서 대범한 척하는 내가 너무 지겹다. 그 허탈함, 불안함, 이 모든 감정들이 뒤엉켜 마음속을 흔든다.


'대체 어떻게 해야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는 건데? 이 불안정한 삶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건데? 모르겠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관계도 조작된 거 같은 이 세상에 흔들리는 내 유리멘탈이 싫다. 그저 반복되는 불안과 괴로움 속에서 잠을 자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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