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불 잘 잠갔나요
이런 예쁜 가스레인지는 저희 집 것이 아닙니다...
출근하자마자 아침마다 임시회의를 30분 가까이 계속했다. 출근하면서 교장실에 들려서 이 사안에 대해서 논의하고 경과를 보고하고 그렇게 서둘러 교실로 올라와서 아이들과 아침 활동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전날 그나마 겨우겨우 준비해 둔 수업을 진행한다. 6학년은 교과 지원이 조금 있는 편인데 어제는 3교시에 영어가 한 과목 들어 있는 날이었다.
아이들 일기장을 들고 교과실에 내려와서 앉는데 그때 갑자기 떠올랐다.
"가스불!!!"
아침에 분명히 작은 냄비에 불을 켠 것은 생각이 나는데 불을 껐는지가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루종일 자면서도 우리 반 두 아이 걱정이 나를 사로잡아서 정말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서둘러 관리사무소에 전화하고 경비아저씨께 죄송하지만 한 번만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렸다.
그리고... 생각나는 부끄러운 가스레인지.
자비를 들여서 바꾸겠다고 했지만 집주인은 그냥 두라고 했다. 20년 된 너무나 낡아서 밑의 오븐은 사용도 할 수 없는 그 낡은 가스레인지는 이미 찌들 대로 찌들어서 잘 닦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열심히 세척도 하고 애를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대강 닦아두었는데 어제는 그 대강의 청소도 하지 않아서 국물이 넘쳐흐르고 음식 부스러기가 남아있는 정말 지저분한 가스레인지였다. 그뿐이랴. 아직 재활용 쓰레기 배출을 하지 않고 며칠 때 반복되는 늦은 퇴근에 집은 정말 아수라장인데 아무리 얼굴 모르는 경비아저씨지만 그런 집안 모습을 보여드렸다고 생각하니 또 다른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월요일에 기분 좋게 퇴근해서 청소를 하려고 했는데 한 번 꼬이기 시작한 일정은 집을 점점 더 어지럽게 만들었고 나중에는 큰 맘을 먹어야 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제도 퇴근이 역시나 늦었다. 저녁을 부랴부랴 만들어서 식사를 차려주고 나서 쓰러졌다. 마음이 너무 긴장하면 잠도 깊게 못 잔다. 눈을 감고 있지만 아이들 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정신을 차려 보니 8시 반 정도. 야구하고 오는 셋째와 학원에서 늦게 오는 첫째도 차례대로 밥을 차려 주고... 정말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청소를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분리수거 좀 덜 할게요.... 분리수거까지 다 하다 보면 진짜로 쓰러지겠다 싶어 그냥 큰 봉지에 자잘한 플라스틱류와 비닐류는 쓸어 담았다. 쓸고 닦고 버리고 분리해서 제 집으로 보내주고 나니 10시가 훌쩍 넘었고, 분명히 저녁 설거지를 했지만 다시 쌓인 한가득 설거지를 마치고 대강 정리를 끝내니 11시 반. 아아니...
늘 나가던 밤 걷기 운동도 포기하고 나가서 아이들 준비물과 간단한 먹거리를 사 오고 밥도 예약으로 지어놨다. 그동안 아이들은 빵과 시리얼을 먹었는데 이제는 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그럼 밥을 해 주마... 했다. 사실 나도 밥이 좋은데 밥은 너무 손이 많이 간다. 조금 더 바빠지겠지만 아이들이 원하는데 해야지... 하하하...
그렇게 청소와 정리를 마무리하니까 근사하진 않아도 그래도 다시 공간이 있는 집으로 바뀌었다.
사실 가스불을 잘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기억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을 것이다. 상황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고 알면서도 가끔씩 감정이 휘몰아칠 때면 쓸려가는 나를 보게 된다. 알지만 침착하게. 냉정하게. 차분하게. 내일이면 금요일이다. 한 주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휘몰아쳤지만 또 배우고 성장했다. 잘 서 가고 있다.
#별별챌린지 #글로 성장연구소